비루한 삶… 그래도 희망은 있다

소설가 김훈(62)씨가 새 장편 '내 젊은 날의 숲'(문학동네)을 냈다. 이전 작품들이 생(生)과 사(死)가 칼날의 양면처럼 엇갈리는 긴박한 전장(戰場)을 무대로 실존의 좁은 길을 찾아나선 이의 내면을 즐겨 그렸던 것과 달리 이번 작품은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청춘 남녀가 등장하는 연애 장면을 선보였다.

그러나 김훈의 연애 서사에는 "사랑한다"는 고백도, 입맞춤 장면도 없다. 대신 김훈 소설의 일관된 지향점이라 할 수 있는 삶의 비루함을 견뎌내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세밀화가인 주인공 조연주는 지방 공무원인 아버지가 토착 세력과 결탁해 뇌물을 받아먹다가 쇠고랑까지 차는 것을 목격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남편의 부정한 돈이 가족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기도 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다 불면증에 걸린다. 조연주가 들어가는 민통선 안쪽 최전방은 국군과 인민군의 유골이 방치된 채 60년이나 나뒹구는 민족적 비극의 현장이다.

소설은 아버지의 구속을 본 조연주가 삶에 대한 환멸을 간직한 채 서울의 직장을 버리고 최전방 수목원에 임시직으로 들어가서 지낸 1년간의 이야기다.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민통선 안쪽 최전방 지역을 여러 차례 여행했다"는 김씨는 "낙엽만 걷어내면 군인의 뼈가 나오는 참혹한 장면을 비롯해 많은 장면을 보았고 그만큼 많은 이미지들이 떠올랐다"는 말로 이번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작가는 그 이미지들을 곱씹어 이전의 김훈 소설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장면들을 추가했다. 비극의 증언자인 유골이 화가와 장교를 이어주는 인연의 끈이 된 것도 그렇다.

'김 중위'의 부탁을 받고 뼈 그림을 그려준 여자는 그로부터 제대 후에 일하게 될 직장의 연락처를 받는다. 조연주는 핸드백을 열어 '그의 명함은 내 립스틱과 로션병 사이에'(338쪽) 끼어 있는지 확인한다. "제대하는 김 중위가 여자에게 연락처를 건네주고 그녀가 남자의 명함을 소중히 간직하는 장면을 통해 그들 앞에 놓인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김씨는 "누군가를 향해 다가가는 간여를 통해 대상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조연주는 수목원 상사인 안요한 연구실장의 자폐아 아들 신우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것을 계기로 안 실장의 삶에도 간여하게 되고, 그 역시 자폐(自閉)를 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신우를 한 번 안아주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작가는 "간여하기를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성패와 상관없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조건"이라고 말했다. 조연주와 김 중위가 민통선 밖에서 만남을 시작하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 반면 타자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은 풍성하게 보여준 것도 그 때문이다. 사진으로는 나무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고 믿는 안 실장이 조연주에게 나무의 세밀화를 그리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꽃의 색깔에는 어떤 구조적 또는 종자학적 필연성이 있는가'라는 안 실장의 연구 과제는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에 대하여 왜 그런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83쪽)이라는 점에서 실패의 운명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조연주는 '꽃의 비밀은 꽃의 내부가 아니라 안요한의 내부에 있었던 것'(같은 쪽)이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타자에 대한 관심은 따라서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탐색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