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이야기] 서해5도 수험생 "바다가 육지라면…"

16일 오전 10시 인천 남구 주안동 주안도서관 2층 평생학습실. 백령도에 있는 백령종합고등학교 3학년 학생 30명이 국어·영어·수학 등 모의고사 문제를 풀며 18일 치를 수능 시험 준비에 열중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육지에서 수능 시험을 보기 위해 지난 13일 백령도에서 배를 타고 6시간 걸려 인천 도심으로 왔다. 친척집이나 사설 숙박시설에 묵고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도서관에 모여 공부하며 교사 지도를 받았다.

이 학교 학생들은 '재학 중인 학교에서 수능 시험을 치를 수 없고 같은 학교 교사가 감독관이 될 수 없다'는 수능 규정 때문에 매년 육지로 나와 시험을 치르고 있다. 감독관이 섬에 파견돼 시험지를 배부하고 회수하는 작업이 물리적으로 어려운 것도 한 원인이다. 인천시교육청 관계자는 "제주도와 울릉도를 제외한 섬 지역 수험생들은 모두 육지로 나와 수능을 본다"고 했다.

18일 육지에서 시험을 치르는 인천 섬지역 학생들은 백령고 외에 대청고 8명, 연평고 7명이다. 이들 학생들이 며칠 묵든 상관없이 인천시교육청은 1인당 4만원의 체류비만 지급한다.

섬지역 학생들의 '수능 원정길'은 만만치 않다. 백령고 학생들은 지난 11일 육지로 나오려 했다. 섬 특성상 파도와 안개 등 기상 변화가 심해 수능 전날 날씨를 예측할 수 없어 미리 떠나려 한 것이다. 그날 오전 7시 30분 선착장에서 꽹과리와 커피믹스 뭉치, '선배님, 수능 대박'이라고 적은 현수막을 들고 온 후배 재학생 10여명과 백령면장, 파출소장, 학교 관계자 등 50명이 출정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로 배가 출항할 수 없었다. 오후까지 날씨가 좋아지길 바라며 선착장에서 대기했지만 결국 떠나지 못했다. 백령고 김병섭(55) 교장은 "이러다가 학생들이 수능을 치르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며 "교사들에게 일기 예보를 수시로 알아보게 하는 등 학교가 비상 상황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다행히 13일 날씨가 괜찮아졌다.

학교측은 만약 학생들이 여객선을 타지 못할 경우 옹진군청에 행정선을 사용할 수 있도록 요청하고, 최악의 경우 해병대 등 군부대에 헬기를 요청하기도 한다고 했다. 실제로 헬기가 뜬 해도 있었다.

백령고 졸업생인 이소연(29)씨는 1999년 11월 16일 수능 전날 헬기를 타고 육지로 왔다고 했다. "직장생활 하면서 재수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수능 시험을 하루 앞두고 선착장에 나왔는데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파도가 거세 배가 뜰 수 없다는 거예요. 급하게 학교에 연락했고 해병대 도움으로 그날 오후 헬기를 탔던 아찔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수험생들의 육지행에 상당수 학부모들은 생업을 중단하고 동행했다. 자녀들 숙식문제를 해결해주고 컨디션을 지켜주기 위해서다. 한 학부모는 "운영하는 정육점을 1주일간 문 닫았다"며 "친척집에 얹혀 지내 눈치가 보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으냐"고 했다. 연평고등학교 김기휘(18)군의 어머니 이모(55)씨는 "도시에 친척이 없어 연안부두 모텔에서 지내고 있다"고 했다.

학부모들은 틈틈이 학생들에게 단체 회식을 마련해주고 간식거리를 제공하는 등 사기를 북돋아줬다. 학부모 유순화씨는 "교사들은 학생들을 돌보고 학부모들이 식당 섭외를 한다"면서 "몇년 전 큰아들 수능 시험 뒷바라지를 한 경험이 있어 학생들 입맛에 맞는 식당을 고르는 일에 익숙하다"고 말했다.

섬지역 학생들과 교사, 학부모들은 섬에서도 수능 시험이 치러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백령고 박송철군은 "배가 파도에 심하게 흔들려 배에서 그냥 누워 왔다"며 "한 친구는 멀미 후유증 탓에 지금도 제 컨디션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병섭(55) 교장은 "학생 한 명이 육지에서 1주일 정도 생활하는데 수십만원의 경비가 들어간다"며 "학생들이 배를 타며 공부할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물론 체력 조절에 실패하거나 바뀐 공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 학부모는 "둘째 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인데 2년 뒤 또 육지에 나올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프다"며 "섬에서도 시험을 보면 학생들이 심리적으로도 안정되고 컨디션 조절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