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에게서 플라톤의 사상도 발견했죠"

"정약용은 복합적이고 다채로운 사람이었어요. 서양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자유의지나 사회계약론 같은 사상이 다산의 책에도 고스란히 들어 있다면 믿겠어요?"

1995년부터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에서 비교철학을 강의하다 지난해 정년퇴직한 김신자(68) 교수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철학사상에 대해 독일어로 쓴 책이 최근 영어로 번역돼 나왔다. 다산학술문화재단(이사장 정해창)과 오스트리아 학술진흥재단(FWF)의 지원을 받아 출간된 'The Philosophical Thought of Tasan Chong'(정다산의 철학사상)이다. 이 책은 김 교수가 지난 2006년 독일 페터 랑 출판사에서 독일어로 낸 'Das Philosophische Denken von Tasan Chong'을 독일 학자 토비아스 쾨트너와 영국 학자 요단 니넴베(Nyenyembe)가 영역(英譯)한 것이다.

고려대 철학과에서 학·석사학위를 받은 김 교수는 1978년 화가인 동갑내기 남편을 따라 오스트리아로 갔다가 1986년 귀국했다. 하지만 1년3개월 만에 남편이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삶은 심하게 흔들렸다. "밥도 먹을 수 없고 잠도 잘 수 없었어요. 사람이 죽었는데 공부는 해서 뭐해…." 3년 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는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학업에 매진했다. 1995년 빈 대학교에서 박사학위(예술철학)를 땄고 곧 강의를 시작했다.

다산을 만난 건 그때였다. "서재의 책들을 살피다가 남편이 읽던 '목민심서'를 발견했어요. 저는 서양철학자라서 그때까지 동양철학엔 눈길도 안 줬었죠. 책장을 넘기는데 새로운 세상이 휙휙 펼쳐졌어요. 다리가 후들거렸죠.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다산 저술을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김 교수는 "다산에게서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를 비롯해 프랑스 사상가 장 자크 루소, 영국 철학자 존 로크, 심지어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도 비교 가능한 사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 "다산은 자주지권(自主之權)을 강조했어요. '인간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거죠. 다산보다 한 세기 뒤 활동한 야스퍼스도 '사람은 자유의지에 따라 선악을 선택한다'고 했어요. 두 사람 모두 인간을 의지를 가진 존재로 파악한 거죠." 김 교수는 "다산을 전혀 모르는 서양인들도 그들이 잘 아는 서양 학자들과 비교해 설명하면 다산 사상의 방대함과 깊이에 감탄한다"면서 "우리는 우리 문화의 독자성과 우수성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신자 교수는 4년 전 독일어판 책을 출간하면서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자택 욕실에서 미끄러지면서 수도꼭지에 오른쪽 눈을 부딪혔고 수술만 세 차례 했는데 눈에 부담을 주면 안 된다는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책을 쓰겠다며 매일 열다섯 시간씩 자료를 읽어댄 탓이다. 그는 "지금 생각하면 눈이 더 귀한데 내가 왜 그랬을까 싶다가도 그 순간이 다시 온다면 나는 또 미친 듯이 책을 쓰고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 김 교수는 이달 말 오스트리아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