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 기자의 촉촉한 시선] 감독의 자의식을 어찌할꼬

할리우드 고전을 사랑하는 관객이라면 영화 '선셋대로'에서 괴팍한 여배우 노마 데스본드를 묵묵히 보좌하던 땅딸막한 집사 맥스를 기억하실 겁니다. 독일 출신의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Stroheim·1885~1957)이죠. 사실 그는 몇몇 인상 깊은 조연으로 활약했던 배우보다, 작가적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영화감독으로 할리우드에 더 이름난 인물이었습니다.

전설로 남은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전성기의 그가 스튜디오 MGM에 제출한 영화 '탐욕'(1925)의 러닝타임은 무려 9시간이었습니다. 1920년대니까 당연히 무성영화 시절이었죠. 인간 탐욕을 파헤쳤다고는 하지만, 대사도 없는 9시간짜리 예술영화를 볼 관객이 1920년대에 얼마나 많았을까요. 당연히 스튜디오는 '편집의 칼'을 들었고, 뭉텅이로 잘려나간 '탐욕'은 2시간짜리 영화로 쪼그라들었습니다. 내용은 뒤죽박죽이었고, 흥행은 재앙이었죠. 여러 함의를 담고 있는 사건이었지만, 할리우드에서는 영화감독의 자의식과 대중 관객의 취향이 충돌한 대표적 사례로 꼽힙니다.

장동건 주연의 '워리어스 웨이'가 어제(1일) 개봉했습니다. 자신이 죽인 적(敵)의 10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서부시대 미국으로 도피하며 칼을 버린 동양 무사(장동건)가 동네 아리따운 백인 여성(케이트 보스워스)의 복수를 돕기 위해 다시 칼을 든다는 이야기죠. 취향에 따라 이 독특한 액션 판타지를 좋아할 관객도 있겠지만, 이 한·미 합작영화가 들였다고 주장하는 제작비(4500만달러·약 500억원)를 회수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10%에도 못 미치는 돈을 들인 한국 로맨틱 코미디 '쩨쩨한 로맨스'보다 이번 주말 극장 상영횟수가 더 적다는군요. 계산 빠른 극장 주인들의 눈치 빠른 판단인 거죠.

뉴욕대 대학원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한 이승무 감독의 '워리어스 웨이'를 본 소감은 '뒤엉킨 취향'이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것 같습니다. '수퍼맨의 연인'인 케이트 보스워스가 한국의 미남 배우 장동건과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연인이 되고, 장르적으로는 할리우드 서부극과 동양 액션, 기관총과 칼이 뒤엉킵니다. 영화를 많이 본 관객 입장들은 셈 페킨파, 쿠엔틴 타란티노, 타르코프스키가 찍은 도장 자국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이 영화가 어느 하나의 취향도 진득하게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샐러드나 비빔밥처럼 조화롭게 섞이는 것도 아니죠. '폭력 미학의 거장'이나 '헤모글로빈의 시인' 등으로 불리는 대중영화의 기수들과 '희생' 등 예술영화의 대표적 감독이 어정쩡하게 손잡고 오른 무대를 한 번 떠올려 보세요.

사실은 글로벌 합작이라는 미명하에 '워리어스 웨이'라는 배를 산으로 올려 보낸 양국 제작자들의 책임이 더 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영화는 감독의 예술인 것을. 차라리 자신의 취향을 지지해 줄 수 있는 소수의 열혈 관객들을 상대로 한 작은 제작비의 영화였다면 어땠을까요. 물론 그때는 장동건도, 케이트 보스워스도 없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