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의 현실을 넘어… 하늘을 날고 싶은 두 남자

지난주 서울 방배동의 영화제작사 '스카이워커'(대표 정태성)에 흥미로운 계약서 한 장이 도착했다. 국내 업계 1위 투자배급사가 총제작비 200억원 규모 프로젝트 '권법'의 기획개발 초기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권법'은 '웰컴 투 동막골'(2005)로 800만 관객을 모았던 박광현(41) 감독과 투자배급사 쇼박스의 전 투자본부장 정태성(47) 대표의 작품이다. 단순한 계약서 한 장이 흥미로운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2010년 충무로 투자 환경에서 배우 캐스팅도 확정되지 않은 프로젝트에 메이저 투자배급사가 기획개발비를 미리 지급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까닭이고, 또 하나는 무려 5년 동안 이 프로젝트에 매달려온 인물들의 집념이 1차 결실을 맺었기 때문이다.

얼핏 무슨 무협 영화로 오해받을 제목이지만, 이 영화는 '권법'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이 미래도시 서울에 숨어 있는 '별리'라는 소중한 마을을 지키기 위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싸우는 SF판타지다.

아내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감독·제작자 커플은 "한국 최초의 판타지 블록버스터"라는 표현으로 '권법'의 의미를 압축했다.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전쟁 블록버스터나 '괴물' 같은 크리처(Creature) 블록버스터, '해운대' 같은 재난 블록버스터는 있었지만, 미래의 도시와 로봇, 기계 등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대작영화는 우리나라에서 사실상 처음 하는 시도라는 말이다.

박 감독과 정 대표는 말과 글 대신에 사무실 벽면에 가득 붙어 있는 미래 도시 디자인·로봇·특수 바이크 스케치와 몇몇 동영상을 보여줬다. 바로 이 대목에서 '권법'이 시도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도전이 있다.

바로 프리 비주얼라이제이션(Pre-Visualiztion). 아직 적당한 우리말이 만들어지지 않은 이 제작기법은, 실제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애니메이션 등을 이용해 각 신(Scene)을 미리 한번 영상으로 만들어 보는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와 동선, 세트들의 위치, 조명과 편집 등에 대한 감독의 생각을 미리 스태프와 정확히 공유하고, 시행착오를 줄여 제작비를 절감하자는 취지다.

'스타워즈'를 필두로 최근의 '아바타'까지 1억달러 이상 제작비를 들이는 할리우드 대작영화에서는 거의 필수 준비사항이지만, 충무로에서는 지금까지 이런 과학보다는 감독의 임기응변과 순발력에 의존해왔다. 부분적으로 이 기법을 사용했던 봉준호 감독 '괴물'의 프리 비주얼라이제이션 분량은 약 4분40초. '권법'은 약 1시간 분량이 될 전망이다.

'웰컴 투 동막골'이 나온 지 이미 5년. 대중과 평단의 사랑을 고루 받았던 감독의 차기작으로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사실은 '웰컴 투 동막골' 개봉 이전부터 구상했던 작품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의 컴퓨터그래픽 기술 수준으로 그 아이디어를 실현하려면 천문학적인 액수가 필요했고, 박 감독의 아이디어는 아직 뜬구름 위에 있었다. 투자자들은 당연히 고개를 외로 저었다.

그때 박 감독의 손을 잡은 게 정태성 대표였다. 그는 2년 전 쇼박스의 사업영역 축소로 투자자에서 제작자로 원대복귀했다. 그는 부산국제영화제 초창기 아시아의 유망한 신인감독과 투자자를 이어주는 부산프로모션플랜(PPP) 수석 운영위원 출신. 영화사 백두대간에서는 이광모 감독과 함께 예술영화를 수입했고, '미녀는 괴로워'(2006) 등을 제작한 대중영화 기획자로서 남다른 '선구안'(選球眼)을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마흔을 넘긴 박 감독이 소년처럼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감독은 물가에 내놓은 아이와 같다. 감독의 아이디어를 쓰레기로 만드느냐, 보석으로 다듬느냐는 제작자 역량에 달린 문제다. 정 대표는 미운오리새끼를 끝까지 백조로 믿어 준 사람이다."

제작사 스카이워커는 영화 '스타워즈' 주인공 루크의 성에서 따온 이름이다. 하늘을 걷고 싶어하는 감독과 제작자. 이렇게 충무로는 '판타지 블록버스터'라는 전인미답의 하늘로 자신의 영역을 한 뼘 더 넓히려 하고 있다.

◆스태프도 블록버스터급!… '권법' 만드는 사람들
미래건축 전문가, 레이디 가가 의상 디자이너…"황홀경 보여주겠다"

영화 '권법'은 장르적으로는 SF 판타지지만, 내용적으로는 약한 자를 위해 손을 내밀고 친구가 될 준비가 돼 있는지를 묻는 말이기도 하다. 지구를 구원하는 할리우드식 영웅 신화가 아니라, 허약한 소년 권법이 별리마을 사람들과 함께 소중한 공동체를 지켜나간다는 따뜻한 내용을 담는다. '웰컴 투 동막골'부터 일관된 감독의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영화 '권법'을 기대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인물들의 면면 때문이다. 박광현 감독은 이 영화가 "설정은 판타지지만 표현은 극사실주의"라고 했다. 리얼리티를 최대한 살리겠다는 의도다. 미래도시 건축에 대한 자문은 미래건축 전문가인 홍익대학교 조택연 교수가 맡았고, 의상 디자인은 레이디 가가·블랙 아이드 피스의 의상을 담당한 이주영 패션디자이너 몫이다. 또 장편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를 연출한 김문생 감독이 컨셉 디자인 수퍼바이저를 맡았고, 또 워너브라더스와 디즈니에서 애니메이션 디렉터를 역임한 송신영씨가 스토리보드를 책임진다. 송신영 수퍼바이저는 할리우드에서 '스튜어트 리틀3'(2004) '닌자 거북이'(2007)의 스토리보드를 그렸다.

박 감독은 "황홀경을 보여주겠다"고 호언했다. 2011년 촬영을 시작해 2012년 여름 개봉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