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한국 시골로 장가 온 영국 남자입니다
입력 : 2010.12.06 23:29 | 수정 : 2010.12.07 11:16
처갓집이 있는 경기 구메농사마을
외지인을 한 식구로 받아들이고 도시인에게 시골체험 기회 주고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싹트는 곳… 거기서 시골의 미래를 보았다
그런데 한국에서 장가를 가면서 변화가 왔다. 경기도 시골마을 이장님인 장인어른 덕분에 시골 생활의 묘미에 눈뜬 것이다.
처가댁이 있는 구메농사마을은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 부근에 있다. 솔직히 내 첫인상은 '이 마을에 살면 변화라곤 없겠구나'하는 것이었다. 인구라고 해야 달랑 43가구였다.
처음으로 처갓집에 묵던 밤, 농가를 에워싼 정적과 어둠에 나는 좌불안석이 됐다. 그동안 소음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가 사는 서울 집은 종로구 자하문터널 근처에 있어서 종일 자동차 소음과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동네 아줌마들이 취해서 늦게 들어온 남편에게 악쓰는 소리도 들린다.
그런데 처가댁 동네 사람들은 나를 허물없이 대했다. 내가 한국에 막 왔을 때는 유행하는 팝송의 영향인지, 나를 보고 "헬로 미스터 멍키!"라고 외치는 아이들도 있었다. 요즘도 외국인이라고 힐끔 쳐다보는 사람이 서울에도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처가댁 동네에서는 아무도 나를 빤히 바라보지 않는다. 도시 사람들보다 오히려 외국인에 익숙한 것 같았다.
최근 마을에서 '농산물 호롱복조리 축제'라는 행사가 열렸다. 이틀간 다채로운 행사에 참여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외지인들에게 구메농사마을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지 느낄 수 있었다. 동네 사람과 외지인을 구분 짓지 않고 기꺼이 한 식구로 받아들인 것도 그런 때문인 것 같았다. 마을의 미래를 적극적으로 개척하려는 의지였다.
대략 1000명이 축제를 찾았는데, 면면이 다양했다. 학생 단체방문도 있고, 구메농사마을과 결연을 한 법무부 직원들도 30명이나 왔다. 방문객들은 마을의 전통 특산물인 복조리를 만들었다. 농작물과 진흙으로 양초를 만드는 코너도 있었다. 모두들 고구마와 파전을 먹고 즐겁게 막걸리를 마셨다.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축제 비용 460만원을 조달했을 뿐 아니라,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수고도 서슴지 않았다. "도시 사람들에게 시골을 체험할 기회를 주고, 시골사람들이 기회만 주어지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번 축제의 목적"이라고 장인어른은 말씀하셨다. 장인어른이 보시기에는 그 점이 바로 한국 시골의 미래라는 것이다. FTA가 되고 안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 장인어른의 지론이다.
"온 세상이 세계화되고 있는데 우리가 계속 거스를 수만은 없지. 앞으로 가야지, 뒤로 가서야 되겠나." 장인어른은 유럽 농촌을 배우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에도 다녀오셨다. 결론이 농업·수공예·관광 등 다양한 방면에서 새로운 상품을 내놓아야겠다는 것이었다. 구메농사마을은 환경부가 꼽은 117개 자연생태계 우수마을에 들었고, 농림수산식품부가 실시한 농촌마을 가꾸기 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차지했다.
고구마와 파전 먹는 곳 바로 옆에는 시원한 막걸리가 넘실대는 독 두 개가 땅에 묻혀 있었다. 파전을 지지는 아줌마들이 손님들에게 빈 병을 건네주면, 손님들이 직접 가서 막걸리를 떠다 마셨다. 기자 시절 버릇대로 쉴 새 없이 노트에 메모를 하던 나도 이 대목부터는 글씨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날 내가 막걸리를 마신 뒤 노래하고 춤춘 건 기억이 난다. 분위기가 흥겨워지면서 남녀노소가 노래하고 춤추기 시작했다. 나는 가무에 도통 자신이 없어 막걸리 독 근처에 남아 있었건만, 한 아줌마가 다가와 덜컥 나를 붙잡아 다들 춤추는 곳으로 끌고 갔다. 아내와 처제가 그런 나를 보고 깔깔거렸다. 다음 순간 나는 무대에 서 있었고 즉석 노래자랑 최종심까지 갔다. 내가 18번 애창곡인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를 부르기 시작했다.
"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홀로 걷는 이 마음~~" 장인어른이 친구분들과 함께 이 노래를 합창하셨다. 앙코르 요청이 빗발치기에 내친김에 이선희의 'J에게'까지 열창했다. 나는 노래자랑 부상으로 쌀과 연잎차를 받아왔다.
날이 어두워지자 동네 사람들이 대나무 잎으로 모닥불을 피웠다. 내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온기나 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외국에선 한국 하면 서울밖에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좋은 시골 사람들과 함께였고, 더 좋은 가을을 즐겼고, 무엇보다 시골의 미래를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