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면 그릴수록 비워지는 화폭… 묘하다, 그 묘법(描法)

한국 현대미술을 개척해온 박서보 화백의 화업(畵業) 60년을 되돌아보는 기념전이 서울 국제갤러리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동시에 열린다.

193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박 화백은 1950년대 앵포르멜 운동을 이끌면서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앵포르멜'은 프랑스어의 'Informel'에서 온 것으로, 뚜렷한 형태가 없이 불규칙적인 형태가 화면에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에서 시작된 앵포르멜 운동은 인간의 잔혹함을 고발한 것으로, 6·25전쟁을 겪어낸 국내 젊은 작가들의 정서와 맞물리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

박서보 화백은 국전(國展)의 운영방식과 보수적인 양식에 반발해 김창열·하인두 등과 함께 '현대미술가협회(현대미협)'를 만들었고, 이 그룹은 격정적인 붓 터치와 두터운 마티에르를 특징적으로 보여줬다. 현대미협이 주축이 된 앵포르멜 운동은 1960년대 국내 추상회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이 운동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이 국제적인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이 무렵 박서보의 작품 〈원형질〉에서 보여지는 검은색은 전쟁을 겪은 참혹함을 표현한 것이다.

박서보 화백은 앵포르멜 운동이 잦아든 이후 1967년부터 묘법(描法) 연작을 시작했다. 그의 묘법 연작은 전기와 후기로 나뉠 만큼 3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 초기 묘법은 회백색의 유채물감을 캔버스에 바르고 그 위에 연필로 드로잉을 연속적으로 그린 뒤, 그 위에 물감으로 덮고 다시 드로잉을 이어나갔다.

그의 묘법 연작은 1980년대 초부터 한지(韓紙)를 여러 겹으로 바르고 수성물감을 이용하면서 새롭게 변화했다. 젖은 한지에 연필을 반복해서 그으면 작가가 선(線)을 긋는 행위의 흔적은 감추어지고 고랑 같은 돋을새김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선 긋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비워내면서 화면에는 엄숙함과 명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박 화백의 초기 묘법이 회화적 드로잉이라면 후기 묘법은 색면(色面)회화라 부를 수 있다. 초기 묘법에는 화면에 긴장감이 도사리고 있지만 후기에는 비워내는 작업을 통해 한결 가벼워지고 평온해진다. 초기에 사용한 캔버스가 탄력적이라면 후기에 사용한 한지는 습기와 주변의 것을 빨아들이는 물성을 드러낸다. 후기 묘법의 특징은 화려한 색상과 한지의 속성을 잘 드러내면서 영원히 살아 숨 쉬는 듯하다.

지난달 25일부터 열리고 있는 서울 국제갤러리 전시는 박서보 화백의 전기와 후기 묘법 연작을 중심으로 50여점이 나와 있다. 엄숙한 가운데 화려한 색면이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박 화백이 작품 제작을 위해 남긴 아이디어 드로잉도 볼 수 있다.

오는 11일 시작하는 부산시립미술관 전시는 박서보 화백의 초기부터 후기 작품까지 70여점이 나온다. 박 화백은 묘법 연작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묘법이 탄생하기 전까지 거쳐왔던 〈원형질〉과 〈유전질〉 연작을 두루 볼 수 있다. 박 화백은 "두 곳의 전시장을 채운다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면서 "내 작품이 수장고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열심히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국제갤러리(02-735-8449) 전시는 내년 1월 20일까지, 부산시립미술관(051-744-2602) 전시는 내년 2월 20일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