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세계 바둑 내 손으로 마무리한다"

    입력 : 2010.12.07 03:02

    1년간 무섭게 큰 허영호…
    연말 삼성화재배 결승서 구리와, 춘란배 8강전서 쿵제와 잇달아 격돌

    삼성화재배 결승과 춘란배 8강 토너 참가를 위해 중국으로 떠난 허영호. 그는“국내 본격 우승을 거치지 않고도 세계 제패에 성공하는 첫 기록을 만들고 싶다”며 투지를 불태웠다.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허영호' 하면 산악인만을 떠올리던 시대는 지났다. 최근 약 1년 동안 탱크 같은 기세로 쳐 올라온 프로기사 허영호(24)가 있기 때문. 그는 연말 국제무대에서 한국 바둑의 대표 사절(使節)로 잇달아 중국 대륙을 누빌 참이다.

    올해 마지막 세계 우승자를 가릴 제15회 삼성화재배 결승 3번기가 7일 베이징서 시작된다. '선수'는 한국 허영호 七단과 중국 구리(古力·27) 九단이다. 이 대회 직후 허영호는 푸저우(福州)로 이동, 14일 제8회 춘란배 8강전서 쿵제(孔杰)와 4강행을 다투게 된다. 16일 준결승까지만 치르고 결승은 내년에 거행된다. 쿵제는 현재 중국 랭킹 1위, 구리는 3위에 올라 있다.

    "둘 다 나보다 강자이므로 편하게 임하려 합니다. 하지만 한국을 대표해 중국 '투톱'을 상대하는 마당에 쉽게 물러날 수는 없죠. 우선 구리와의 삼성배 결승에 최대한 집중할 생각이에요." 구리와의 통산 전적은 1승 1패. 구리는 9월 삼성화재배 1회전 때 허영호에 패하고도 패자전서 '부활', 이세돌·김지석을 연파하고 결승까지 왔다.

    한때 세계 4관왕을 누볐던 구리에 대해 허영호는 "감각이 뛰어난 대신 경솔함과 지나친 낙관주의 등 약점도 있다"고 진단한다. 이번 아시안게임서 보여준 구리의 컨디션 역시 정상은 아닌 느낌. 허영호는 "경직된 행마만 나오지 않으면 해볼 만하다"며 첫 판을 잡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최근 한 달간 구리의 기보를 샅샅이 훑는 한편 사활 공부에 특히 집중했다. "구리와 두려면 사활이 특히 중요할 것"이란 김지석의 조언 때문이었다. 이번 베이징 원정엔 박정상과 김지석 등 절친한 선후배들이 동행키로 해 심리적으로 큰 도움이 될 전망.

    춘란배 8강에 이름을 올린 한국 기사는 허영호와 이세돌 두명뿐이다. 중국 5명, 일본 1명(조치훈)의 협공을 견뎌야 한다. 허영호는 쿵제와의 8강전 전략을 '거친 공격'으로 정했다. "워낙 안정적이고 탄탄한 기풍이어서 정형(定型) 대결보다는 난전이 바람직하다"는 것. 쿵제와의 공식전은 처음이지만 2006년 신예대항전 때 한 차례 이긴 기억이 있다.

    아직 국내 무대조차 정복해본 적이 없는 허영호의 세계 정상 노크는 그 자체로 얘깃거리다. 신예기전과 마스터스 토너먼트서 한 번씩 우승해 본 게 전부다. 이런 '건너뛰기'가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허영호는 "국내외 가릴 것 없이 모든 기사의 실력이 평준화됐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어떤 면에선 예선 통과가 더 어렵고, 일단 세계 본선에 나서면 오히려 심리적으로 더 편해지기도 한다는 것.

    그 말이 사실이라 치더라도 최근 허영호가 보여주고 있는 수직 상승 커브는 경이적이다. 작년 10월 제14회 삼성화재배 8강 진출 때 12위였던 랭킹이 지난 3월 춘란배 8강 상륙 무렵 10위로 오르더니, 11월 5위를 거쳐 12월엔 4위까지 치솟았다. 2007년 무렵 20위권 밖에 머물던 기사라곤 믿어지지 않는다.

    "비결이랄 건 없고…. 과거 건성으로 기보를 검토했다면 요즘엔 좀 더 음미하고 몰입하며 봅니다. 중요 대국을 몇 차례 이기면서 자신감이 쌓이기도 했고요." 허영호는 그러나 말끝에 "언제건 다시 떨어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떨치기 힘들다"며 낯빛이 어두워지기도 했다.

    아시안게임 전 종목 석권에 대해선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중국을 꼭 이기고 싶다는 소망대로 된 건 좋았지만 내가 못 나간 것은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선발전 당시 그는 랭킹 하나 차이로 최종 선발전에 끼지 못했고, 병역 특례 기회도 날아가 버렸다.

    "어쩌다 보니 올해 한국 바둑의 마무리 투수가 된 느낌이에요. 이번 9회 말을 열심히 잘 막아내 꼭 세이브를 안겨주고 싶습니다." 프로 10년차 대학생(경기대 중국어과) 기사 허영호는 5일 첫 격전지 베이징을 향해 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