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혀버린 영화계 이야기 끄집어냈죠"

"이제는 70대 후반이 된 1960년대의 인기 여배우였어요. 완벽한 분장과 머리를 하고 나타나셨어요. 그런데 조명 없이는 하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4대의 조명을 세웠지요. 1년에 10편의 영화를 찍던 감독들은 요즘의 영화제작 시스템에 거품이 많다고 했어요. 후배 영화인들이 하나같이 '외국의 유명 감독들로부터 영향받았다'고 하는 데 대해선 깊은 서운함을 보였고요."

한국영상자료원(원장 이병훈) 조준형(40) 부장과 4명의 객원연구원은 2004년부터 원로 영화인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하고 있다. 한 해 수백 편의 영화가 쏟아져 나와 양적·질적으로 '한국영화의 전성기'라 불리던 1960년대를 풍미했던 이들이다. 지금까지 97명을 만났다고 한다. 감독·배우가 절반이고, 나머지는 조명·미술·촬영·배급 등 다양하다. 한 사람이 8~10시간에 걸쳐 자신의 삶과 영화인생을 말했다. 연구원들이 이를 녹화해 동영상을 만들고, 책으로도 냈다. 조 부장은 "한국 영화에 대한 사료가 너무나 없어서 시작한 일"이라고 했다.

"192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영화가 5000편은 제작됐는데, 3700편만 남았어요. 특히 1950년대 영화는 20%, 60년대는 40%만 남았죠. 필름으로 남지 못한 영화를 기억해내고, 한국 영화사를 폭넓게 이해하자는 의도였습니다. 영화에는 그 시대의 삶과 문화가 담겼잖아요. 연구자뿐 아니라 모두에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배우 신영균, 코미디언 구봉서, 성우 고은정, 감독 정창화·신동헌씨 등이 포함됐다. 정창화 감독이 1960년대 홍콩으로 가 찍은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미국에서 개봉된 최초의 쿵푸영화로, 당시 할리우드 박스 오피스를 휩쓸었다. 미국의 유명 감독인 쿠엔틴 타란티노가 이 영화에 큰 영향을 받아 자신의 영화 '킬빌'에서 오마주(존경의 뜻에서 다른 영화의 주요 장면 등을 인용하는 것)를 바치기도 했다. 신동헌 감독은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을 만든 이다. 인터뷰에 응했던 원로 영화인 97명 가운데 10명은 이제 고인이 됐다. 이 작업이 필요한 이유다.

"안 하겠다는 분도 많았어요. '왜 과거를 들추려 하느냐'는 분, '그런 거 할 만큼 늙진 않았다'는 분, 이유는 다양했지요. 라이벌 비판, 정치계와 얽힌 비화들을 얘기해 놓고 나중에 없던 일로 해달라는 분도 있었고요. 그럴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인기 여배우들은 1년에 수십 편 찍는 게 예사였는데, 그런 분들은 너무 바빴기 때문에 오히려 당시 영화계를 몰랐고요."

원로 영화인들의 입에서는 사료만으로는 알 수 없던 생생한 이야기가 넘쳐 나왔다. 영화계 파벌이나 경쟁 구도, 검열의 정도, 영화인들의 생활상 등이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의 더듬거림, 한숨, 사투리, 욕설도 그대로 담았다. 조 부장은 "개인적 욕망, 감추고 싶은 사실, 무의식까지 표현해 과거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원로 영화인들의 삶과 기억을 구술로 정리하는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한국영상자료원에 가면 열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