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이야기] 탄광촌 마지막 의사 '검은 땅 仁術' 30년

9일 오전 11시쯤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성심병원 2층 병동에서 흰 가운을 입은 원장 방덕환(76)씨가 진폐증 환자 김진문(65)씨에게 청진기를 대며 "간밤에 기침 많이 하지 않았어요?"라고 물었다. 진폐증은 호흡기로 들어간 분진(粉塵)이 폐에 염증 등을 일으키는 병이다. 김씨는 "오늘은 좀 괜찮은 것 같다"며 웃었다. 그는 20여년 탄광에서 일하다 얻은 진폐증으로 2001년부터 10년째 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 이 병원에는 김씨 같은 광부 출신 진폐증 환자 60여명이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다.

방씨는 강원도 고한·사북 일대에서 30년째 환자들을 돌보는 마지막 탄광촌 의사다. 탄광 50여 곳이 호황을 누리던 80년대 초반 5만명에 이르던 주민은 이제 500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광부들을 돌보던 의사들도 떠났다. "병원 옆 검은 하천을 바라보면서 '이 석탄가루가 다 없어지면 서울로 가야지' 생각했지요. 물이야 십 년 전에 깨끗해졌지만 사람들 폐에 석탄가루가 남아 있어서 여길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976년 아프리카로 건너가 4년간 의료 봉사를 하고 귀국한 방씨는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탄광촌의 한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 친구를 만나러 갔었다. 방씨는 "병원에 탄광 사고로 피투성이가 된 광부는 수백명인데 의사가 부족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며 "딱한 마음이 들어 1주일만 봉사하기로 했는데 그게 30년이 됐다"고 했다.

병원에는 밤낮없이 광산에서 사고를 당한 환자들이 밀려들었다. 갱도가 무너지거나 석탄 나르는 화물차에 광부들이 깔려 팔·다리가 절단되는 사고가 잦았다. 새까만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광부 수십 명을 치료하고 나면 흰 가운도 땀과 피, 석탄가루로 뒤범벅됐다. 그는 80년대 중반 갱도가 무너지는 큰 사고가 났을 때 수혈할 피가 부족해 '피동냥'에 나서기도 했다. 방씨는 "읍사무소를 통해 예비군 수백명을 소집해 한 줄로 세우고 '헌혈하면 예비군 교육 한 번 면제'를 외쳤었다"고 했다.

전쟁 같은 일상이 5년쯤 반복되자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환자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절단 수술을 하면 "왜 다리를 절단했느냐"는 비난이 돌아왔고, 협박으로 돈을 뜯어내려는 악질 환자도 있었다. 도로 포장이 안돼 '부인 없이 살아도 장화 없인 못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열악한 기반시설에도 지쳐 갔다. 그는 "유선전화까지 불통인 날이면 멀리 두고 온 가족 생각이 간절해 서울로 돌아가려 하기도 했다"고 했다.

이런 방씨를 붙잡은 건 가난했지만 정은 넘쳤던 탄광촌 주민들이었다. 마을 여성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의사선생님 드시라"며 김장김치와 머루, 떡 등 먹을거리를 보냈고, 남정네들은 저녁때면 "삼겹살에 소주를 마셔야 석탄 찌꺼기가 내려간다"며 방씨 옷자락을 잡고 술집에 갔다. 결국 방씨는 병원을 차리려고 사뒀던 서울 영등포구 땅과 집을 팔아 1986년 인근 고한읍에 병원을 세웠다. 반대하던 부모님과 가족들도 방씨의 끈질긴 설득 끝에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끝없던 탄광촌 일은 병원을 차린 다음해부터 갑자기 줄었다. 정부가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에너지원을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는 정책을 추진하자 탄광촌이 쇠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방씨는 "병원 적자가 나는 날도 많았지만 갑자기 실업자가 된 주민들이 더 걱정됐다"고 했다. 방씨는 탄광사고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돌보고, 어려운 환자는 몇달씩 병원비를 대줬다. 30년 된 구식 라디오를 듣고, 줄곧 월셋집에 살면서 아낀 돈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방씨를 "고한읍의 슈바이처"라고 칭송했다.

마을은 폐광촌으로 변해갔지만 진폐증을 앓는 환자들은 늘어나자 방씨는 2000년쯤 수십 명이 장기 입원할 수 있게 병원을 고쳤다. 방씨는 "나도 환자들도 이 검은 땅의 전성기와 쇠퇴기에 젊은 날을 바쳤기에 뭉클한 형제애가 있다"며 "한 명의 환자가 있다 해도 끝까지 여기서 머무르고 싶다"고 했다. 병원 직원들은 "원장님은 이곳의 아버지이자 큰형님 같으신 분"이라며 "올해로 탄광촌에 온 지 30년이 되신 원장님을 위해 조만간 환자들과 작은 파티를 열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