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그녀 나이 여덟, 은퇴가 멀지 않았습니다

"슬기는 단순한 안내견이 아닙니다

그녀는 제 딸이고, 연인이고,

13살 때 시력 잃은 저의 삶 자체입니다

내 꿈은 슬기를 위한 사진집 만드는 것

셔터 누르는 순간, 저는 희망을 찍습니다"


단 한 치 앞도 구별할 수 없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렌즈를 사람 소리에 맞춰 조준한 뒤, 셔터를 누릅니다. 10여번을 넘게 누르고 초점이 빗나간 사진이 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눈이 안 보이는 장애인들이 사진을 찍는다면? 실제 사진 찍히는 것조차 거부하며 살아왔던 제가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다니 그건 천지개벽이었습니다.

국내 한 대학에서 실시하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사진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꽃잎을 만지고 각도를 맞춰가며, 대학생 멘토(mentor)들의 조언에 따라 사진을 하나 둘씩 찍어보니, 새로운 감격이 파도처럼 밀려듭니다. 멘토들이 제 손가락을 끌어다 일일이 사물을 짚어주며 특징은 무엇이고, 어떤 각도로 찍어야 한다고 설명해주니, 어렸을 적 보았던 추억들이 되살아나는 것이었지요. 내가 보았던 아름다운 꽃, 파랗던 바닷가, 그 푸르던 숲들…. 잊었던 어린 시절의 색감을 불러 모아, 피사체를 재구성하며 다시 제 가슴에서 인화를 시도했습니다. 연분홍 꽃잎이 발그스레 제 가슴을 수놓았고, 불타는 저녁노을도 제게로 조용히 들어와 앉았습니다. 노랗고 붉은 색 깃털의 앵무새를 향해 셔터를 눌렀고, 바닷가 모래사장의 여인을 불러 제 안으로 초대했습니다. '찰칵' 하는 경쾌한 카메라 소리에 빨려들면서 13살 때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은 이후 저를 억눌렀던 삶의 고통이 모두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맹학교에 들어가 처음 흰 지팡이를 받아들고 보행 교육을 받았을 때, 온몸으로 몰아쳐 오던 그 아찔한 공포를 저는 지금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차도에서 달려오는 자동차가 인도에 서 있는 제게 달려드는 것 같았고, 인도를 거니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제게 따가운 시선을 던져오는 것 같았습니다.

대학도 졸업을 1년 앞둔 4학년 초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홀로 강의실을 옮겨 다닐 수도 없고, 때에 맞춰 식당에도 갈 수 없는 현실에 절망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런 저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것이 슬기였습니다. 6년 전 우연히 '내 사랑 토람이'라는 드라마를 알게 되었지요. 극중 주인공이 실명의 어려움 속에서도 재활하고 자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토람이란 안내견의 도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혹시 나도 안내견을 받으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그렇게만 되어준다면….' '안내견 학교'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6년 전 여름에 슬기와 첫 만남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여에 걸친 합숙 훈련이 끝났을 때, 저는 전혀 다른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 되어 있었지요.

슬기는 제 사진의 다시없는 소중한 모델이 되었습니다. 제 앞길의 안내자이며, 가슴 뜨거운 연인이기에, 슬기와 함께하는 날들은 그 어떤 두려움도, 막막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슬기와 함께하는 삶도 쉬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얼마 전, 슬기와 함께 사진찍기를 마치고 일행들과 생맥줏집 유리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였습니다. 맥줏집 주인의 난처한 목소리 한마디에 저는 출입문 앞에서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우리 가게는 개를 데리고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 개는 애완견이 아니라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내견인데요." "다른 곳에 가보시지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자는 동료의 만류도 뿌리친 채, 저는 솜뭉치처럼 잦아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안내견을 거부하면 위법입니다." 눈물이 나왔습니다. 마지못해 주인은 우리 앞에 맥주잔을 놓고 갔습니다. 저는 일행에게 미안했고 슬기에게도 미안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도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슬기를 안내견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제 딸이고, 연인이고, 제 삶 자체입니다. 슬기의 나이 벌써 여덟 살, 이제 은퇴도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제 간절한 소망은 슬기를 위한, 그녀만의 사진집을 만들어 보는 것입니다. 술에 취해 아픔의 탄식들만 나열해 가던 내 시작(詩作) 노트를, 이젠 영상이란 희망의 언어로 아름다운 사연들을 옮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둠의 수렁에 처음 들어섰을 때는 누구나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초조한 순간을 이기고, 눈조리개가 서서히 어둠에 익숙해질쯤엔 반드시 새로운 길, 희망의 빛이 조금씩 비쳐들 거라는 걸 저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빛을 따라 조금씩 나아가노라면 새로운 삶, 새로운 길이 있습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저는 희망을 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