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II] "정신이 살아있어야 나라 지키고 행복 지켜요"

지팡이를 짚고 보좌관의 부축을 받으며 단상 위로 올라간 김동길(82) 연세대 명예교수는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었고 목소리는 잠겨 헛기침을 연발했다. 김 교수는 허리디스크 수술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청중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90분 동안 강의할 수 있을까?"라는 소리가 군데군데서 들렸다. 지금까지 강연에 나선 7명의 명사(名士) 중 처음으로 단상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왼손에 마이크를 쥐고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조선일보 경기북부취재본부가 주최하고 제화회사 안토니 바이네르가 후원하는 '행복한 인생 만들기' 7번째 시민강좌가 지난 10일 오후 6시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렸다. 연세대 부총장과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 등을 지낸 김동길 교수가 올해의 마지막 강좌를 맡았다. 800석 규모의 그랜드볼룸은 김 교수의 근황을 궁금해 하는 시민들로 가득찼다. 의자 200여개를 더 내와야 했다.

◆"나라를 지키는 일이 행복을 지키는 일"

김 교수는 대한민국을 지키는 일이 행복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한국은 한심한 나라가 아닙니다. 굉장한 나라예요. 우리 선수들은 국제대회에서 일본보다 훨씬 많은 금메달을 따고 있어요. 삼성 TV가 소니 TV 보다 더 많이 팔려요. 우리 동포들은 이제 대한민국 출신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는 뭡니까?"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G20이 열렸을 때 세종대왕이 생각났습니다. 그 분이 보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라고도 했다.

김 교수는 그 힘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들을 통해 이어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안중근과 정몽주, 성삼문의 정신이 살아 있는 민족이에요. 그런 자부심이 없으면 나라를 뺏길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적화통일이 되면 여러분의 행복이 어디 있습니까? 나라가 있어야 돼요. 이 나라를 지켜야 돼요. 그게 여러분의 자존심이에요"라고 말했다. 열변을 토하는 김 교수의 목소리가 그랜드볼룸을 울렸다.

구본애(48·고양시 장항동)씨는 "역사의 산증인인 교수님의 강연을 들으며 그동안 잊었던 국가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알 수 없는 인생,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행복해져

김 교수는 또 이승만,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역사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세월은 무섭고 인생은 알 수 없다'는 진리를 전했다.

"관상도 목소리도 그런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될지 누가 알았겠어요. 용하다는 관상가들도 모두 못 맞혔다고 해요." 그래서 그는 이 자리와 이 순간이 중요하다고 했다. 김 교수는 "여러분 중에서 장차 어떤 사람이 나올지 모릅니다. 아이들 공부 못한다고 구박하지 마세요. 이병철 회장은 반에서 25등을 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사관학교에서 200등 했답니다"라고 말했다.

90분을 꽉 채우고 일어선 김 교수는 오른손에 지팡이를 짚고 청중을 향해 비스듬히 섰다. 그리고 왼손을 2번 힘차게 들어올려 박수에 화답했다. 그의 표정이 국민당 대표최고위원으로 활동하던 20여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이날 김동길 교수의 강연을 끝으로 지난 6월부터 시작한 '행복한 인생 만들기' 시민강좌는 올해 일정을 모두 마무리했다. 그동안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와 김창옥 퍼포먼스 트레이닝 연구소 대표, 김미경 아트스피치 원장, 용혜원 시인, 김정운 명지대 사회교육대학원 여가경영학과 교수, 신상훈 서울종합예술학교 개그MC학부 교수가 저마다의 행복론으로 시민들을 웃거나 울게 했다.

다음 달 13일 킨텍스에서 열리는 새해 첫 강연에는 산악인 박정헌(39)씨가 인간 승리의 감동을 전할 예정이다. 박씨는 안나푸르나, 에베레스트 등을 등반한 국가대표 산악인 중 한 명이다. 그는 2005년 히말라야 촐라체(6440m) 북벽 등반에 성공한 뒤 조난돼 발가락 전부와 손가락 8개를 잃었다. 그의 삶, 그의 이야기를 통해 인생을 왜 흔히들 등산에 비유하는지 깨닫는 자리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