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이야기] 희귀병 남편 기적적으로 살아나자 매달 2만5000원씩 25년 동안 기부

"벌써 25년이나 됐나요? 이젠 공과금 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에 밴 일인데요 뭘."

지난 16일 오후 7시 '홀트아동복지회 55주년 후원의 밤' 행사가 열린 서울 광진구 광장동 공연장 악스코리아 로비에서 전영옥(62)씨는 홀트아동복지회 홍미경(53) 팀장이 건넨 후원내역 기록서를 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수십장짜리 기록서엔 전씨가 1985년 3월부터 지난달까지 25년간 매달 2만5000원씩 낸 후원금 내역이 빠짐없이 기록돼 있었다. 전씨는 옛날 생각이 나는 듯 1986년 받았던 한 어린이의 편지를 가방에서 꺼냈다.

"고마우신 후원자 아주머니께. 이번에 홀트 선생님을 통해 학용품과 신발을 감사하게 잘 받았습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정광식 올림."

초등학생용 노트 한 장에 연필로 큼지막하게 적힌 편지를 보며 전씨는 "어린애가 또박또박 쓴 이 편지를 받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며 "남을 돕는다는 게 큰 행복을 준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고 했다.

전씨는 남편이 1985년 3월 위(胃)에 병명조차 알 수 없는 희귀병이 생겨 죽을 위기를 겪다 살아난 후부터 기부를 해왔다.

"직장도 다 정리하고 죽음만 준비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한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의료진도 '기적 같다'고 했어요. 세상에 보답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전씨는 '새 생명을 얻었다'는 뜻으로 네 식구에 한 명 몫을 추가, 매달 5000원씩 내는 홀트아동복지회 후원계좌 다섯 개를 만들었다. 그때부터 매달 2만5000원씩 내온 것이다. 자동이체를 하면 초심(初心)을 잊게 될까 봐 25년간 매달 직접 지로영수증을 들고 은행에 가 돈을 부쳤다.

정군 편지를 받은 후엔 밀알선교회·대한사회복지회·살레지오나눔의집·꽃동네·겨자씨선교회 등 5개 기관에도 비슷한 액수로 후원해왔다. 1985년부터 고려대·숭의여대·안산일대학 등에서 식품영양학 강의를 하다 2007년 은퇴한 전씨는 남편도 모르게 자신이 번 돈에서 후원금을 내왔다. 딸 이예종(36)씨는 "스무살이 돼서야 우연히 엄마가 모아둔 지로영수증을 보고 정기적으로 후원하신다는 걸 알게 됐다"며 "엄마가 비싼 옷이나 신발은 사준 적이 없어 어릴 때 불평도 많이 했었는데, 엄마가 다시 보이고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이씨도 이후 어머니를 따라 16년째 장애인·고아단체 등 20개 기관에 후원하고 있다.

그동안 '얼굴 없는 후원자'였던 전씨는 이날 후원의 밤 행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1989년 홀트아동복지회에 입사한 후 전씨와 계속 연락해온 홍미경씨는 "20년 넘게 늘 통화만 하며 그렇게 뵙고 싶다고 해도 '너무 적은 액수다'며 계속 피하시더라"라 했다.

행사 마지막쯤 장기 후원자인 전씨를 소개하는 동영상이 대형 스크린에 떴다. 전씨는 "25년 전 이 일을 시작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라며 눈물지었다. "앞으로는 사회복지 단체나 기관 등에서 일하며 어려운 분들을 직접 만나 돈이 아닌 '몸'으로 돕고 싶다는 게 제 마지막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