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민의 평점 따윈 필요없어]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 조금씩 꺼풀 벗겨낸 진실들… 누가 惡妻에게 돌 던질 수 있나

톨스토이는 일기의 첫마디를 암호 같은 글로 시작했다고 한다. 바로 "오늘도 나는 살아 있다"는 뜻의 약자였다. 죽음은 그의 오랜 공포이자 궁극의 탐구 과제였다. 그런 그가 악처의 성화에 못 이겨 가출 후 시골 간이역에서 허무하게 죽다니. 이 얼마나 비극적인가. 그러나 눈밭에서 홀로 죽어갔을 톨스토이를 상상하셨다면 한시름 놓으시길. 그가 누운 역장 관사 앞에는 세계 유수 언론사 기자들과 추종자들이 텐트를 치고 그의 역사적인 죽음을 배웅했으니까.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은 이렇듯 짐작으로만 아는 톨스토이에 관한 진실을 조금씩 꺼풀을 벗겨가며 생기 있게 보여준다. 그 중 가장 생생한 부분은 악처로 소문난 아내 소피아와의 갈등이다. 헬렌 미렌이 연기한 소피아는 우리의 편견과 달리 은근히 사랑스럽다.

성자로까지 추앙받는 공적인 인간 톨스토이를 남편이라는 사적인 역할로만 환영하는 소피아를 그저 철없는 백작부인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 저작권을 사회에 환원하려는 남편의 신념을 이해 못 한 점은 안타까우나 그런 소피아의 존재도 엄연히 톨스토이를 이루는 일부다.

농부의 옷을 입었으나 결국 하인이 따라주는 차를 마시던 톨스토이는 자신의 도덕적 이상에 모순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했다. 그 중 하나가 죄악을 부르는 더러운 재산과 그것을 악착같이 지키려 한 아내 소피아였다.

그러나 아내와 가족을 버리기에 그는 얼마나 인간적인 사람인가. 그의 마지막 가출은 지나치게 많은 명예와 영광, 위선과 모순을 짊어진 톨스토이가 행할 수 있는 마지막 결연한 의지였다. '오직 혼자서만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일기에 적은 대로, 톨스토이는 신 앞에 헐벗은 마음으로 설 수 있음에 기뻐하며 그 낯설고 차가운 역에 기꺼이 몸을 뉘였을지 모른다. 우주와 인간을 통찰하던 그 빛나던 영혼도 영원한 시간 앞에서는 그저 스쳐가는 간이역의 작은 노인네에 불과했을 테니까.

올해 서거 100주년을 맞아 톨스토이가 죽은 아스타포보 역에서 작은 꽃다발과 함께 추도시를 읊는다면 여기 노르웨이 국민 시인 하우게의 시는 어떨까.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나의 갈증에 바다를 주지 마세요. 빛을 청할 때 하늘을 주지 마세요. 다만 빛 한 조각, 이슬 한 모금, 티끌 하나를, 목욕 마친 새에 매달린 물방울같이, 바람에 묻어가는 소금 한 알 같이.' 이 시처럼 소박한 울림을 전하는 텅 빈 그릇이 되고자 했던 톨스토이. 어쩐지 이 넘쳐나는 시대에 생경스러운 대문호의 바람을 그리워하며 말이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감독 마이클 호프만. 출연 헬렌 미렌, 크리스토퍼 플러머, 폴 지아마티. 12월 15일 개봉.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