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기러 가는 길, 누가 가란다고 가나"

강원도의 동지(冬至)는 매서웠다. 수은주는 영하 4도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대관령 칼바람이 얼음장 같았다. 이곳에서 카자흐스탄 동계아시안게임 국가대표가 되려 악전고투를 벌이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크로스컨트리 선수들이다. 여자는 5㎞, 남자는 10㎞ 달려야 했다. 하나같이 얼굴이 빨갛게 얼고 헛구역질까지 해댔다. 그 속에서 태연히 1위(12분50초08)로 골인한 선수가 있었다. 한국의 크로스컨트리 '여왕' 이채원(29)이었다.

■"난 쉬지 않는다"

크로스컨트리는 '눈 위의 마라톤'이라 불린다. 오르막과 내리막에 평지가 섞인 코스를 여자는 최고 30㎞, 남자는 50㎞까지 달린다. 한마디로 동계 스포츠의 '극한(極限)'이다. 이채원은 이런 크로스컨트리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다.

그가 전국동계체전에서 딴 금메달이 무려 45개다. 은퇴한 남자 알파인 스키 허승욱(43개)을 넘어 역대 최다관왕이다. 국가대표 생활도 평창 대화고 1학년 때부터 15년간이나 이어오고 있다.

키 153㎝ 몸무게 45㎏의 작은 몸집이지만 동료 국가대표보다 8~9살 많은 현재에도 그를 따를 경쟁자는 없다. 타고난 끈기와 지독한 훈련 덕분이다. 크로스컨트리와 인연을 맺은 것은 대화중 1학년 때였다.

"시원하게 질주하는 알파인 스키를 기대했는데 감독님이 평지만 걷게 하는 거예요. 알고 보니 크로스컨트리였던 거죠." 매일 방과 후 3~4시간 스키를 신고 걷는 훈련은 차라리 '중노동'에 가까웠다.

그럴수록 이채원은 더 운동에 집중했다. 다들 쉴 때도 그는 홀로 달렸다. "힘들수록 더 큰 쾌감을 느끼는 게 마라톤과 비슷했어요. 한번 빠지니 헤어나기 어렵더라고요."

이채원은 요즘도 하루 3~4시간은 꼭 훈련한다. 스키를 못 탈 계절에도 산에서 달리거나 스키 밑에 바퀴가 달린 롤러스키를 탄다. 지난 3월 결혼해 일주일간 신혼여행을 다녀온 게 일생의 가장 긴 휴식이었다고 한다.

■"세계의 벽은 높더라"

한국에선 적수가 없는 이채원에게도 국제 무대 수준은 너무 높다. 그는 2월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15㎞ 추발 59위, 여자 10㎞ 프리스타일 54위에 그쳤다. 꼴찌나 다름없는 성적이다. FIS(국제스키연맹) 세계 랭킹도 260위다.

끈기와 체력만으로는 힘과 기술을 앞세운 유럽·북미 선수들을 당해내기에 역부족이다. "제가 폴을 두 번 찍어 갈 거리를 그 선수들은 한 번에 가버리죠." 거기에 열악한 한국 크로스컨트리의 현실도 그의 어깨를 누른다.

한국 선수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눈 위에서 연습하는 시간은 길어야 한 달 정도이다. 비싼 돈 주고 자주 전지훈련 나갈 형편이 안 되기 때문이다. 협회 차원의 지원도 크로스컨트리가 생활인 유럽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이채원은 동계아시안게임 메달을 노린다. 카자흐, 우즈벡, 일본이 워낙 강해 가능성은 적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등수가 아니라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에요. 그게 크로스컨트리의 가장 큰 매력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