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소원 들어주고 싶어" 호텔 총주방장의 성탄 만찬

"돌아가신 어머니가 이 음식을 드셨다면, 정말 편안히 눈을 감으셨을 거예요."

24일 저녁 7시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 이 호텔 이병우(55) 총주방장이 요리한 '낙지 숙회'를 한 점 집어먹던 신은주(45)씨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신씨는 이날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아 이 주방장이 초청한 150여명 중 한 명이다. 이 주방장은 '내 생애 마지막 식사가 차려진다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은?'이라는 주제로 먹고 싶은 음식과 그에 얽힌 사연을 모집했다.

신씨는 '당뇨 합병증으로 6년 전 돌아가신 엄마가 마지막으로 드시고 싶어 하셨던 육회를 만들어 달라'는 사연으로 이날 식사에 초청됐다.

신씨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 어느 날 육회를 찾았다. 신씨는 백화점에서 육회를 사다가 배를 채 썰어 넣고 참기름에 버무려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신씨는 "조금 있다 어머니 드리려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육회가 한 점도 없었다"며 "올 5월 세상을 떠난 동생이 다 먹어버렸는데, 그때 동생을 나무랐던 게 후회가 된다"고 말했다. 신씨 동생의 생일은 바로 44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이날 구제역 파동으로 신씨가 신청한 요리인 육회는 낙지 숙회로 대체됐지만, 신씨는 "이제라도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리고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이 주방장은 준비한 음식을 일일이 나르면서 150여명의 손님을 맞았다.

이 주방장은 이날 행사를 위해 한 달여 전부터 사연을 받았다. '임용고시에 떨어지고 나서 아버지가 격려해주며 사준 아귀찜이 먹고 싶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자주 해 주셨던 찜갈비가 먹고 싶다' 등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연을 보냈다.

이 주방장은 "독일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생의 마지막 요리를 해주는 요리사 '루프레히트 슈미트'의 이야기를 듣고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G20 정상회담 때 대표요리사를 맡았던 이 주방장은 "주방장만이 할 수 있는 봉사가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는 것 아니겠느냐"며 "크리스마스 이브에 내가 마련한 음식으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 행사에 참가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초청된 주연(30)씨는 7년 전 갑상선암 투병 중이었던 자신에게 스테이크를 사주며 프러포즈를 했던 남편에게 감사를 전하기 위해 사연을 보냈다. 이들의 자리 앞에는 7년 전 구로구의 어두컴컴한 경양식집에서 먹었던 찹스테이크 대신 윤기가 흐르는 어린양갈비스테이크가 놓였다. 주씨는 "그때 먹은 스테이크 맛을 잊을 수 없었는데, 남편에게 받았던 큰 선물을 이제야 보답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