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대기업 '전문경영인型 오너' 전면에 나서다

연말 대기업 인사의 가장 큰 특징은 오너 일가의 경영 일선 전진 배치였다.

지난 10월 LG전자의 새 사령탑으로 구본준 부회장이 등장한 것을 시작으로 이달에 이재용 삼성전자 최고운영책임자의 사장 승진과 SK그룹의 최재원 수석 부회장 임명이 이뤄졌다.

오너 일가가 경영 최전선에 등장한 것은 오너의 리더십을 통해 불투명한 경제 상황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구본준 LG 부회장과 최재원 SK 수석 부회장의 경우 친형인 구본무 LG회장이나 최태원 SK 회장과 비교할 때 그룹 내 보유 지분이 미미하다. 그래서 새로운 '전문경영인형(型) 오너'체제가 등장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오너 일가이지만 전문경영인처럼 전문성을 바탕으로 경영 성과에 책임을 지는 시스템이란 얘기다.

◆위기 상황에 긴급 투입된 전문경영인형 오너

구본준 부회장의 경우 LG전자의 재기(再起)를 위한 불가피한 카드였다. 그는 LG디스플레이의 경영(1999~ 2006년)을 맡아 세계적인 디스플레이 회사로 키운 경력이 있다. 서울대 계산통계학과와 시카고대 경영학석사(MBA) 출신 '전자통(通)'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외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과 최재원 SK그룹 수석 부회장은 그룹 전반의 최고운영책임자(COO) 역할을 맡았다. 이재용 사장은 그룹 간판인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태양전지·의료기기·바이오제약·자동차전지·LED(발광다이오드)와 같은 신사업을 조율하는 데 힘을 모을 것이란 전망이다.

최재원 SK 수석 부회장은 SK그룹의 미래전략실과 같은 부회장단을 이끌며 SK그룹의 숙원사업인 글로벌사업을 직접 챙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스탠퍼드를 나와 하버드대 MBA를 거쳤다.

이들 외에도 최근 경영 일선 전면에 나선 오너 경영인은 제법 된다. '형제간의 갈등'으로 퇴진했던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15개월 만인 지난달 복귀했다. 장세주 회장의 친동생인 장세욱 동국제강 부사장은 연말 인사에서 그룹전략경영실장을 유지하며 유니언스틸 사장을 맡았다.

대한전선의 오너 3세 설윤석 부사장은 연말 인사에서 부회장으로 건너뛰었다. 대한전선은 주채권 은행과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맺고 그룹 투자자산을 모두 정리하는 등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다.

◆'오너 경영' 긍정 시각 더 늘어

해외에서 한국 기업들의 오너 일가 경영체제를 보는 시각은 예전보다 긍정적인 편이다. 과거에는 '제왕적 오너체제'를 비판하는 관점이 많았지만 최근 '신속한 의사 결정'이란 이유에서 오너체제를 긍정하는 시각이 학계를 중심으로 늘고 있다.

벨렌 빌라롱가 하버드대 경영대학 교수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최신호 논문에서 '미국과 유럽 기업 4000여 곳의 성과를 비교한 결과 오너 경영 기업들이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을 한다'고 결론냈다. 이 논문은 미국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 '2011년 특별판'에 소개됐다.

금융시장과 그룹 내부 직원들은 오너 경영자의 전진 배치를 지지한다. LG전자의 한 임원은 "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한두 달 안에 투자를 결정해야 하는 긴박한 순간이 많은데, 오너 경영인이라면 눈치 볼 것 없이 곧바로 결정하는 '스피드 경영'이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구본준 부회장의 LG전자 사령탑 등극 소식이 알려진 당일(9월 17일) LG전자 주식은 5% 정도 급등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의 승진 이후 삼성전자 주가는 주당 100만원 고지를 향해 가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해야

하지만 대기업들의 오너체제 강화를 우려하는 시각도 상당하다. 10% 미만의 소수 지분을 가진 창업주 일가의 경영 복귀 또는 전면 배치가 기업을 개인이나 가문의 소유로 여기는 전근대적 관행의 결과물이라는 지적이다. 게다가 그룹이 위기에 빠지면 오너 경영체제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수 있다.

연세대 경영학과 정동일 교수는 "오너 경영인들은 후계자들에게 경영권을 상속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리수를 범하는 경우가 잦다"며 "정상적인 경영 룰을 무시한 편법·불법 경영은 기업에 오히려 독(毒)이 돼 경쟁력 약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오너 일가 경영체제의 최대 걸림돌은 재벌체제에 대한 서민들의 거부감이다. 한양대 경영학과 홍성태 교수는 "오너 경영인들이 더 적극적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해야 한다"며 "그래야 오너 경영인에 대한 일반인의 안티(anti) 정서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