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시 나의 인생] 산꾼 이대실의 청량산

이대실(67)은 지금 떠날 준비를 한다. 퇴계 이황이 즐겨 찾은 청량산 오산당(吾山堂)에 들어온 지 19년 만이다. 이대실은 산꾼이다. 눈 내린 청량산은 그를 보낼 준비를 한다. 이대실이 말했다. “더 교만해지기 전, 내 인생을 갈무리하기 위해 떠난다”라고.

경북 봉화 청량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이대실이 대접하는 차를 마신다. 청량사 응진전으로 가는 오솔길에 퇴계의 오산당이 있고 그 옆에는 이대실이 만든 산꾼의 집이 붙어 있다. 달마(達磨)를 그리다가, 도자기를 굽다가 문득 등산객이 나타나면 이대실은 데워 놓은 찻물을 따라 그들에게 건넨다. 혹자는 그더러 자유인이라고 했고, 혹자는 광인(狂人)이라고도 했다.

“삿갓 벗어놓고 밭 갈다가 100뙈기 밭 가운데 99뙈기밖에 없기에, 삿갓을 들어보니 거기에 한 뙈기가 숨어 있었다.” 첩첩산중 봉화는 그런 땅이다. 그만큼 숨겨진 땅이기도 했다. 하지만 퇴계 이황이 청량산에 정자를 지어놓고 음풍농월하며 즐겼다는 사연도 있고, 이 땅에 성리학을 들여온 유학자 주세붕도 동학(同學)들과 함께 이 산을 마음껏 즐겼다. 1992년 6월 그 아름다운 청량산에 이대실이 둥지를 틀었다.

젊은 날 출가를 꿈꿨던 이대실은 이곳 청량사를 찾아가 스님 되겠다고 청했다. 그때 살던 노(老)비구니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연꽃을 닮은 거대한 청량산 암봉들은 그때 깊게 깊게 각인됐다. 대신 결혼을 하고, 사업을 했다. 예식장을 하고, 사진관을 해서 큰돈을 벌었다. 결혼하던 날, 아내에게 말했다.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살 테니, 내 (가족들에게) 남겨줄 거 60%를 이루면 산으로 가겠다”라고.

어느덧 30년 세월이 흘렀다. 가족 몰래 청량산에 와서 오산당을 수리한 뒤 아내와 여행을 떠났다. 서울에 있는 한 찻집에서 말했다. “내 속내를 털어놓겠소.” 속내를 털어놓기 전에 아내가 대답했다. “긴 이야기 마시고 떠나십시오.” 수리가 끝난 오산당은 아내와 함께 도배를 했다. 그리고 차비 2만5000원이랑 쌀 한 말, 된장 한 사발 들고 산으로 들어왔다. 이대실은 “그때 나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됐다”고 했다.

사내 하나가 청량산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산꾼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그 사내는 공짜로 차를 주고, 달마를 그리고, 나무를 깎아서 뭘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대실이 말했다. “첫 두 해는 구름만 봐도 춤이 나올 정도로 좋았다. 3년째? 외롭더라. 그래서 반 년을 ‘깡소주’ 마시며 울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울려고 산에 왔나?” 이대실은 그 어떤 날 이후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달마를 그린다. 나뭇조각으로 목걸이를 만든다. 가마를 만들어 도자기를 굽고, 바람 불면 퉁소를 분다. 작품이 팔리면 그 돈으로 약차를 끓여 등산객들에게 나눠준다. 단풍철에는 하루 2만 잔도 끓여봤다.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사람들도 수없이 구했다. 가족에게 빚졌고 장사하느라 남들 속였으니, 그렇게 공양하며 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느라 세월이 갔다. 어느덧 오직 이대실을 만나러 청량산에 간다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청량산은 곧 이대실이었다.

그런데 그가 떠난다는 것이다. 그가 말했다. “도자기 가마에 첫 불을 땔 때 이리 적어넣었다. ‘또 가야 할 길이 있기에 동가식서가숙 떠돌던 내 영혼, 잠시 여기 쉼표를 찍을 뿐이다.’ 친구들이 이유를 묻기에 이리 답했다. 수십억 재산 던지고 온 놈이 여기에 왜 애착을 갖겠는가. 더 머물게 되면 교만해진다. 나이가 들었을 때, 한 번 더 단순해져야 하고 입이 닫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자리로 들어가야 한다.” 용맹정진하는 승려들은 한 공부 끝나면 절을 떠난다. 떠날 때가 이르면, 스님들은 전화번호부까지 다 태워버리고 인연을 끊는다고 했다. 이대실은 그 한 공부를 하고 싶다. “달마를 그리며 붓 한 자루를 얻었고, 그릇을 구우며 손맛을 얻었다. 더 이상은 그만.”

맑은 눈동자를 가진, 세상 초월한 산꾼이야 훨훨 날아 사라지면 그만이지만, 우리네 범부(凡夫)들은 이제 어디에서 차를 얻어 마셔야 하나. 그가 말했다. “좋은 후배들이 또 와서 차 대접을 하겠지? 나는 안녕, 하고 내려오는 그 순간까지 물을 데우고 있을 것이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암봉에 깔려 있던 잔설이 바람에 흩날렸다. 사내가 말했다. “나 죽으면, 화장해뒀다가 이렇게 바람 세게 부는 날 청량산 꼭대기에 뿌리라고 했다. 그러면 내 혼(魂)이 날아가다가 야, 저놈 한판 잘 놀다 가는구나 하고 껄껄 웃으며 하늘로 가게.” 한 해가 저무는데, 사내는 벌써 훨훨 날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