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빚어낸 악역… 소름이 돋는다

경복궁 돌담 작은 틈새까지 온통 흰 눈이었다. 서울에 올겨울 첫 대설주의보가 내렸던 28일.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윤석은 조금 들떠 보였다. "우리는 그냥 눈만 보면 좋아요. 뭐, 어렸을 땐 워낙 귀했으니까." 그의 고향은 부산. 이 소년 같은 웃음을 짓는 부산 사나이가 '황해'(22일 개봉)의 잔인무도한 '면가'와 포개질 수 있을까. 영화에서 그는 연변의 조선족 청부 살인 브로커. 자신을 몰래 습격한 한국의 조직폭력배 패거리를 손도끼로 도륙한 뒤 "대갈(대가리) 따로 버리고, 나머지는 개 주라"며 부하들에게 내뱉는 무심한 명령이 면가의 캐릭터를 압축한다. 성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지만 김윤석의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 연기에 대해서는 대중의 환호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배우 본인은 비슷한 이미지를 반복 소비한다는 부담이 없을까. 이미 최동훈 감독 '타짜'(2006)의 아귀 역으로 한국 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악역 중 하나를 빚어낸 그가 아닌가.

"사실 손해 보는 짓이죠. 할리우드 영화를 봐도 '악의 화신'으로 성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백 편 중 한 편? (배트맨에서 조커 역할했던) 죽은 친구 있잖아요. 히스 레저 정도? 자칫 어설픈 악역을 했다가는 비웃음만 살 뿐이죠. 하지만 면가는 조금 다르다고 봤어요. 아귀가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든 최악의 야비한 캐릭터라면, 면가는 도덕과 윤리는 뒷전인 연변에서 나름대로 의리와 약속을 지킬 뿐이에요. 어마어마한 차이죠.(웃음)"

그는 '면죄부'라는 표현으로 면가를 옹호했다. 면가가 먼저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는 없고, 항상 당한 뒤의 복수라는 것이다. 그리고 "개 타고 말 장수 하던 시절의 고구려 기질"이란 비유로 이 캐릭터의 의미를 확장했다. "잃어버린 할아버지 시대를 떠올렸어요. 센스와 세련미는 없지만 투박하고 정감 있는. 왜, 요즘도 서울의 필동면옥이나 을지면옥 같은 이북 냉면집에 가면 있지 않습니까. 냉면 한 그릇 드시면서 소주 한 병 훌쩍 비우시는 아르신들. '대×통을 부솨 버린다' '간나새×, 죽여버리가서'로 대표되는 기질들 말이죠. 일격필살(一擊必殺), 촌철살인(寸鐵殺人)!"

'황해'는 어떤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앓고 있는 대한민국과 아직 순수함을 잃지 않은 조선족 사회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조금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산업화의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는 충무로와 날것으로서의 매력을 잃지 말아야 하는 배우의 입장 사이에서 김윤석은 어떤 원칙으로 이 둘 사이의 갈등과 긴장을 화해시키고 있을까.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세 가지를 꼽았다.

"일단 무조건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시나리오로 작품을 선택한다는 것. 잘 아는 감독의 제안이건 친한 제작자의 부탁이건 필요 없습니다. 둘째, 내가 잘할 수 없는 것은 하지 않는다. 투자? 제작? 그런 건 몰라요. 제가 다행히 물욕(物慾)은 별로 없거든요. 마지막으로 오지랖 넓히지 말자는 것. 쓸데없이 발 넓히지 말고 선택한 작품에서 같이 하는 배우들과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자는 게 제 원칙입니다."

부산의 연극 무대에서 서울로 올라와 '범죄의 재구성'(2006)으로 스크린 데뷔한 이래 만 5년. '타짜'(2006) '천하장사 마돈나'(2006) '즐거운 인생'(2007) '추격자'(2008) '거북이 달린다'(2009) '전우치'(2009) '황해'(2010)가 그의 영화 이력서다. 동네 수퍼 아저씨 같은 평범한 소시민부터 압도적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악역까지 그는 차가운 연기와 뜨거운 연기가 모두 어울리는 충무로의 예외적인 자산이 됐다.

"우리 배우 선배들께 배운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연기를 잘하려고 하지 말고 정확히 하려고 해라'. 잘한다는 평가는 관객이 해 주는 것이고, 배우의 의무는 정확히 하는 것이다."

삼청동 골목길에 쌓인 눈 위 다양한 무늬의 발자국이 휘황했다. 부디 신년에는 좀 더 많은 재능 있는 감독들이 이 성실한 배우의 새로운 얼굴을 찾아내 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