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로만 살 뻔했는데 학자 도와서 행복"

"아스피린 같은 약(藥)을 만들어야 할 유기화학자가 옆길로 빠진 '이상한' 인생이지요. 그대로 화학자로 살았으면 항암제 하나 정도는 만들었을지 모르지요…. 그렇지만 어려운 기초학문 분야에 내 돈도 아닌 돈을 지원하며 호강했습니다."

한국학술협의회 김용준(83) 이사장이 연말 퇴임한다. 최근 '우리 학문이 가야 할 길'(아카넷)을 출간해 600호를 기록한 '대우학술총서' 발간, 그리고 기초학문을 육성해온 30년 학술지원 활동의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는 1981년부터 대우재단 자문위원으로, 1996년부터는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으로 학술지원사업을 이끌었다.

김용준 이사장이 대우재단의 학술지원 사업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0년 고려대 화공과 교수에서 두 번째 해직된 것이 계기가 됐다. "실험실을 빼앗기고 '화학자로는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대우재단에서 자문위원으로 함께하자고 했죠. 출근할 곳도 없던 처지였고, 당시로써는 본격적인 학술지원 사업이 거의 없다시피 하던 때라 신나고 보람있게 일했습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학술사업에 대해 당부한 것은 '불우'하고 '부진'한 분야를 돕자는 것이었다. 김 이사장은 "매주 이용희(대우재단 이사장) 신일철(고려대 철학과) 노재봉(서울대 외교학과) 교수와 함께 회의를 열어 어떤 분야, 어떤 학자를 도울 것인지 논의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며 "때로는 전국을 직접 다니면서 지방의 우수한 학자를 수소문해 연구비를 지급했다"고 회고했다.

김 이사장은 1998년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한국학술협의회가 대우재단의 학술지원 업무를 인수한 이후 기존 활동에 더해 2000년부터 '석학연속강좌'를 개설했다. 매년 국내외 석학들이 일반인과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고, 6개월에 한 번 학술지 '지식의 지평'도 발간하고 있다.

그는 대학과 교수의 권위가 떨어진 데 대해 걱정이 많았다. "요즘 교수들을 보면 '큰 학생' 같아요. 교수들을 논문 숫자로 평가하니 거기에 쫓겨 한 편이면 될 논문을 두세 편으로 쪼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래선 대학의 발전이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이 평생 쓴 논문이 16편입니다. 게으른 교수들을 징계하는 방법은 달리 찾더라도 이런 제도는 바뀌어야 합니다." 김 이사장은 교수들에 대해서도 "스페셜리스트도 좋지만 폭넓은 제네럴리스트, 어른의 권위를 갖춘 교수상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