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한국인이여 행복하라] 가족은 나의 힘 그리고 나의 짐

A씨의 시아버지는 10년 전 치매에 걸렸다. A씨는 시아버지의 대소변을 치우고 목욕을 시키며 21세기 첫 10년을 보냈다. 얼마 전엔 A씨의 시어머니까지 치매 판정을 받았다. 두 노인의 수발, 모두 A씨의 몫이다. 맏며느리인 B씨도 생선장사를 하면서 뇌졸중 시아버지를 40년 넘게 수발했다. 주변 사람들은 B씨를 '효부(孝婦)'라고 치켜세운다.

연말이나 어버이날마다 지자체와 복지재단 등에서 수여하는 '효행상' 수상자들의 이 같은 사연은 '가족'에 대한 한국인의 극진한 애정, 그리고 고단한 애환을 동시에 드러낸다. 조선일보·한국갤럽·글로벌마켓인사이트가 신년기획 '2011년, 한국인이여 행복하라'를 위해 전 세계 10개 나라 5190명을 조사한 결과 '핏줄'로 엮인 한국인들의 가족애(愛)는 남달랐다. 그러나 육아·간병 등 인생의 여러 문제를 가족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행복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가족에 대한 한국인의 양면적 감정을 "오랜 유교문화와 급격한 경제성장이 결합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한국인 27.5% "가족은 혈연관계로 맺어진 사람들"

가족에 대한 생각을 물었을 때 한국인들 사이에선 '가장 사랑하는 사람'(67.6%·10개국 평균 64.0%)이란 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10개 나라 가운데 한국인의 가족사랑은 브라질(78.7%) 핀란드(75.3%)에 이은 3위였다. 연령별로는 40대·50대 여성(각각 73.7%, 74.1%), 즉 엄마들의 가족 사랑이 유난했다. 가족이 '혈연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이라고 답한 비율(27.5%)도 10개국 중 세 번째로 높았다. 핀란드·미국·호주 등 서방 국가 국민들은 가족을 '핏줄'과 연관시켜 보는 비율(각각 10.2%·20.6%·22.3%)이 비교적 낮았다.

한국인의 가족에 대한 애정은 행복도와 직결됐다. 행복하다고 답한 사람 중엔 4명 중 3명이 '가족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답했다. 자신을 불행하다고 평가한 한국인 중엔 이 답변이 절반밖에 나오지 않았다. 행복하지 않다는 사람 중 가족을 '인생의 큰 부담'이라고 여기는 비율(5.0%)은 행복한 사람들(2.0%)의 두 배가 넘었다. 일리노이대 심리학과 에드 디너 교수는 "가족과의 강한 유대감은 어떤 비상사태가 닥쳐도 '내 편'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고 말했다.

◆육아·간병… 가족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가족 복지'

끈끈한 가족관계는 안보의 위협과 불안한 경제에 시달리는 한국인에게 안정감을 제공해주는 안전판이었다. 그러나 '핏줄 공동체'는 일부 구성원에게 행복을 희생하라는 부담을 지우는 부작용을 낳았다. '가족과 떨어져 산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 '가족이 병에 걸려서'라고 답한 한국인은 3.2%였다. 베트남(1.4%)을 제외하고 가장 낮으면서, 행복 9개국 평균(8.5%)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 수치다. 덴마크·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에선 이 답이 약 11%씩 나왔다. 한국갤럽 허진재 이사는 "가족이 병에 걸렸을 때 병원이나 요양시설에 맡기기보다 집에서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반영된 결과"라고 말했다.

김호기 교수는 "성장을 복지보다 중시하는 급격한 산업화 사회를 겪으면서 한국인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가족 복지'를 구축하고 살았다"며 "형제·자매의 대학 진학을 위해, 자신도 충분히 능력이 되면서 대학을 포기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던 많은 40~50대의 사례가 대표적인 경우"라고 말했다.

◆"아이를 왜 안 낳는지 모르겠다" 한국 5% vs 행복 9개국 25%

가족의 유대감을 중시하는 한국인은, 출산 앞에서 머뭇거렸다.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에 대해 '육아와 업무를 겸하기 어렵다'는 답(20.4%)이 가장 많은 국가는 한국이었다. 이 답은 특히 20대와 50대에서 많이 나와 아이를 낳아야 하는 젊은 부모들과, 아이를 돌봐줘야 하는 조부모 세대의 스트레스를 드러냈다. 나머지 9개 나라 평균은 12.3%. 보육을 국가에서 책임지는 핀란드의 경우 육아와 직장 사이의 갈등으로 고민한다는 답은 8.8%에 불과했다.

행복서베이 결과 한국인 중 '아이를 왜 낳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답은 5.3%였다. 덴마크·핀란드·호주에서 이 답은 각각 44.7%·36.5%·26.5%에 달했다. 행복 9개국 평균은 한국의 약 5배인 25.5%였다.

행복과 출산율의 상관관계를 연구해온 펜실베이니아대 사회학과 레이철 마르골리스 연구원은 이메일 인터뷰에서 "세계 80개 나라를 조사한 결과 자녀를 기르는 데 대한 부담감이 클수록 부모의 행복도는 급감했다. 자녀 자체가 행복이나 불행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자녀를 기를 수 있는 요건을 얼마나 잘 갖췄는지가 행복을 좌우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오는 3월 '인구와 개발 연구'에 발표될 예정인 마르골리스 연구원의 보고서 '행복과 출산율에 관한 국제적 전망'에 따르면 아이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통념과 달리, 대부분의 나라에선 20~39세 부모의 행복도가 아이를 한 명 더 낳을 때마다 하락했다. 단, 핀란드 등 보육 강국에선 아이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행복도가 비슷했다. 마르골리스 연구원은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사람들은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때 국가의 발전이나 경제적 이득보다 '내가 얼마나 더 행복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면서 "국가 경쟁력 강화를 이유로 출산을 강요하기보다는, 아이를 낳아도 부모의 행복이 저해되지 않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행복 여론조사 어떻게 했나

조선일보·한국갤럽·글로벌마켓인사이트가 10개국(한국·덴마크·말레이시아·미국·베트남·브라질·인도네시아·캐나다·핀란드·호주) 5190명을 설문조사했다. 한국을 제외한 9개 국가는 각종 행복관련 조사에서 최상위권을 기록한 나라들이다. 조사 기간 12월 16~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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