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가득한 춤… 서투른 몸짓마저 아름답다

피나 바우쉬(Bausch·1940~2009)가 모두에게 친숙한 이름은 아니다. 더구나 클래식 발레도 버거운데 현대 무용이라니. 이런 한국적 특수성에 비추어 볼 때 피나를 소개하는 '현대 무용의 전설' 혹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무용가'라는 식의 저널리즘 수식어는 오히려 피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녀의 취지와 달리 피나를 한국 대중과 더 멀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댄싱 다큐 영화 '피나 바우쉬의 댄싱 드림즈(Dancing Dreams)'는 그런 의미에서 반가운 도전이다.

2009년 6월 30일 피나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처음 나온 이 다큐 영화는 이런 '엘리트의 벽'을 허물면서 피나가 평생 꿈꾸던 춤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바로 천상(天上)을 지향했던 클래식 발레와 지상으로 내려왔던 피나의 현대 무용이 갈라졌던 지점, 인간이 어떻게 움직이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가의 문제의식이다.

'댄싱 드림즈'는 피나의 일대기가 아니다. 혹시 그의 전기를 꿈꾸며 이 영화를 찾는다면 당신은 헛걸음하게 될 것이다. 건조하게 요약하면 이 89분의 다큐멘터리는 그의 대표작인 '콘탁트호프(Kontakthof)'의 제작기다. 피나 바우쉬가 직접 등장하는 장면도 그리 많지 않고 극적인 드라마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에서 당신이 마주하는 배우는 춤이라고는 생전 춰본 적 없는 10대 청소년 46명뿐. 자신을 믿지 못하고 춤에 대한 큰 비전도 없던 이 평범한 틴에이저들이 매주 토요일 연습을 위해 극단으로 모인다. 첫 공연까지 남은 시간은 1년. 얼핏 지루해 보이는 이들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점점 그들의 회의(懷疑)와 열정 그리고 마침내 얻게 된 성취감에 자신을 겹쳐 놓게 된다. 묘하면서도 뿌듯한 경험이다.

콘탁트호프는 사람들이 접촉을 위해 만나는 장소라는 의미다. 독일어로는 '매음굴'이라는 험한 의미도 담고 있는데, 피나는 이 극을 1978년 12월 초연했다. 다수의 남성과 여성을 등장시켜 강렬한 사랑과 욕망, 극심한 불안과 공포, 상실과 고독, 가슴을 에는 슬픔과 고뇌 같은 인간 실존의 주제들을 몸으로 표현한다. 아니, 그런 감정들이 어떻게 인간의 몸을 움직이게 하는지를 그린다. 피나는 2000년에 65세 이상 노인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댄서와 함께 '콘탁트호프'를 공연했고 2008년 공연에서는 그 대상을 14세에서 18세까지의 싱싱한 육체로 확대했다. 난해한 현대극이 아니라 보는 즉시 어떤 감정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편안한 시도다. 이번 다큐에 담긴 콘탁트호프는 그 당시 독일 부퍼탈 인근 12개 학교에서 모여든 청소년 46명의 '신체 여행'이자 '감정 여행'인 것이다.

그들은 춤에 대한 학습 경험도 없고, 우리가 발레리나에게 기대하는 신체 비례도 갖추지 못했다. 보스니아 내전의 상처를 딛고 국경을 넘은 어른스런 소년 가장도 있고 재능과 상관없이 발레리나를 꿈꾸는 막연한 철부지 소녀도 있다. 하지만 각자 주인공이 되어 무대를 이끄는 그리스 비극의 프로타고니스트처럼 그들은 몸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클라이맥스 격인 마지막 공연 장면보다 더 강력한 감정의 울림을 이끌어내는 대목은 무대 뒤의 연습 순간이다. 사랑받고 싶지만 두려움 때문에 다가서지 못하는 인간 본연의 감정들, 그 상반된 감정 때문에 탄생하는 희극과 비극의 순간들이 89분의 다큐멘터리에 빼곡하다.

피나 바우쉬는 "나의 콘탁트호프 무대는 첫 경험, 첫 시도, 친밀감의 표현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고 했다. 결국 '콘탁트호프'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몸으로 쓰는 사랑과 욕망의 서사(敍事)다. 프로 발레리나들의 완벽한 호흡이 아니라 부끄러움 많고 수줍은 우리 주변 평범한 갑남을녀들의 서투른 몸짓에 실린. 그래서 춤에 대한 그들의 꿈(Dancing Dreams)이 더욱 친근하다. 서울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와 강남 시너스 단 두 개 극장에서 20일 개봉한다.

●피나 바우쉬는…

1940년 독일의 작은 도시 졸링겐에서 태어났고, 2009년 6월 30일 암 진단을 받은 뒤 5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를 통해 현대무용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대중이 많다. 사람들의 일상에서 동작들을 찾아내고 그 동작들을 무대 위로 가져와 '춤'이라 칭했다. 1973년 부퍼탈 발레단 단장으로 임명되면서 부퍼탈 탄츠테아터로 개명했다. 춤+연극의 합성어인 '탄츠테아터'는 피나 바우쉬 무용극의 기본 개념이다. 1979년, 2000년, 2005년 한국에서 공연했다. 2005년 LG아트센터 공연 당시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애연가였다. 스페인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그녀는 나를 울게 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영화 '그녀에게'(2002) 엔딩 장면에는 피나 바우쉬가 직접 공연한 춤 '마주르카 포고'가 들어 있다. 목가적이고 고통에 찬 아름다움이 그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