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이야기] [글로벌 영 파워] 사무실서 신문지 깔고 자던 청년, 10년만에 英 1위 증권사 전무에

그로부터 11년 뒤 한씨는 패트릭 한(38)이란 이름으로 금융강국인 영국의 업계 1위인 RBS증권 아시아 투자담당 본부장(전무급)으로 일하고 있다. 팀원 15명을 데리고 유럽·중동의 기관투자자들을 상대로 아시아 투자전략을 제시하는 업무를 지휘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국비 유학생으로 공부하던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1974년 태어났다. 아버지 한능수씨는 박사학위를 따고 귀국해 강원대 교수가 됐지만, 2년 만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없는 그의 가족은 가난했다. 고교시절부터 이삿짐 운반, 건설현장 일용직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마련했다. 대학 다닐 땐 선친의 한을 풀기 위해 유학을 꿈꾸며 이를 악물고 돈을 모았다. 그러나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꿈은 물거품이 됐다. "1년치 유학비를 모았지만, 환율이 올라 두 달 생활비로 쪼그라들더군요. 어머니가 하시던 오디오 가게도 환율급등 여파로 파산했죠. 빚을 갚고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선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절박한 환경은 남다른 근성과 투지를 불러일으켰다. HSBC증권의 20대 애널리스트가 작성한 고품질 분석보고서는 세계적 투자은행인 JP모건증권의 눈을 사로잡았다. JP모건에 스카우트된 그는 2002년과 2004년 신용카드사 수익 급증과 신용카드발 거품 붕괴를 정확히 예측해 이름을 날리며 애널리스트로 황금기를 구가했다.

"당시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 여파로 수출의 성장 기여도가 떨어졌고, 정부는 내수진작책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용카드 사용을 장려하는 정책이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카드사 수익이 급증할 것이란 보고서를 처음 내놨습니다. 반대로 카드 돌려막기 현상이 생긴 2004년엔 가계부채 위기를 경고하는 보고서도 최초로 냈어요." 세계은행과 미국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 초청을 받아 기라성 같은 국제금융 대가들 앞에서 '한금 금융의 미래'에 대해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2003년 만 31세 나이로 JP모건 서울지점 부사장에 승진했다. 다시 미국 유학을 꿈꿨지만, 교통사고를 당해 석 달간 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한창 일할 나이에 현장에서 더 뛰자'고 마음을 바꿨다.

퇴원 후 그는 증권 브로커로 직종을 바꿔, JP모건 유럽 본사 한국담당 딜러로 재취업했다. 1년 만에 중하위권이던 JP모건의 한국 거래 중개 순위를 1위로 끌어올려 2년 만에 상무로 승진했다. 그사이 결혼해 가정도 이뤘다. 2009년 말엔 RBS증권 아시아투자 본부장으로 스카우트됐고, 다시 8개월 만에 전무로 초고속 승진했다.

"새벽 6시 출근해 하루 세끼를 모두 딜링룸(증권·외환 등을 거래하는 곳)에서 때우며 하루 14시간 이상 일에 매달립니다. 일반 직장인보다 훨씬 많이 벌긴 하지만, 아직 자동차도 없고 골프도 안 칩니다. 후회 없이 매일 최선을 다해 살자는 게 제 인생의 모토입니다."

그는 금융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해달라고 하자, "금융 전공자들은 자기 세계에만 갇혀 시야가 좁다"면서 "사회와 실물경제를 폭넓게 보는 안목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취미로 고대 전쟁사 책 읽기를 좋아하는데 극한 상황에서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병사들로부터 최고의 능력을 끌어냈던 로마시대 부사관(Centurion)들에게서 지혜를 얻는다"면서 "인문학적 소양을 함께 쌓으라"고 권유했다.

 

[이슈] '글로벌 영 파워' 관련기사 더보기

2000년 가을 HSBC증권 서울지점 사무실에서 '시체 소동'이 있었다. 새벽에 청소부가 사무실 바닥에 널브러진 젊은이를 시신으로 착각해 소동을 벌인 것이다. 잠시 후 시신이 아니라 신문지를 깔고 새우잠을 자던 입사 1년차 직원 한정호(당시 27세)씨로 확인됐다. 1999년 연세대 영문과를 나와 HSBC은행을 거쳐 증권맨이 된 한씨는 애송이 애널리스트로 금융·반도체·항공사 업황을 분석하느라 철야를 밥 먹듯 했다.

"IMF 외환위기 직후라 HSBC은행에 겨우 입사했습니다. 하지만 인문학도 출신이라 기초가 너무 없다는 걸 절감했어요. 9개월 만에 이론과 실물을 함께 배울 수 있는 증권사로 옮겼죠. 애널리스트를 자원했는데, 거의 전 업종에 대한 분석 지원 업무를 도맡아야 했습니다. 매일 새벽까지 일하다 사무실에서 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