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세 넘어 마침내, 가르침의 꿈 이루다

"집에 가서 남편이나 아내에게 '아이시테루(あいしてる·사랑합니다)'라고 말해보세요. 무뚝뚝하게 하지 말고, 나처럼 애교 있게!"

서울 강서구 방화11사회복지관 교실 강단에 선 추수연(82) 할머니. 그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하자 아저씨·아줌마·할머니 등 15명이 "아이시테루"라고 따라 외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추씨는 지난해 12월부터 매주 화요일 이곳에서 주민들에게 일본어를 무료로 가르친다.

대구의 부농(富農) 집에서 태어난 추씨는 1946년 숙명여대 국문과에 들어갔다. 교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1950년 여름, 졸업을 앞두고 국문과 석사과정에 합격했는데 6·25전쟁이 터졌다. 추씨는 "어렸을 때부터 키워온 교수의 꿈을 전쟁 후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져 포기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1960년 전쟁 때 가족을 도와준 윤덕봉씨와 결혼했다. 가족을 대전에서 대구로 자동차에 태워 피란시켜주고 빼앗긴 집문서도 되찾아준 은인이다. 군인이던 남편은 종전 3개월 전에 허리와 하체에 총상을 입었다. 이후 후유증으로 직장을 구하기 어려웠고 아이도 가질 수 없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며 아무런 꿈도 이루지 못한 아쉬움에 힘겨워하던 추씨는 7년 전 우울증까지 걸렸다.

"그때부터 일본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사람들 만나는 게 싫어서 읽기 시작한 일본책이 유일한 기쁨이었죠. '겐지이야기(源氏物語)'를 쓴 헤이안 시대 여성작가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가 제일 좋아요."

2년 전, 남편은 간암으로 결국 세상을 떠났다. 추씨는 작은 영구임대아파트에서 국가유공자 보조금 월 15만원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우울증이 심해져 생필품을 살 때를 빼고는 밖에 나가지 않았다.

추씨를 세상으로 다시 끌어낸 건 방화11사회복지관의 복지사 김소연(27)씨다. 김씨가 추씨에게 이웃에게 일본어 강의를 해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추씨는 "다들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외국어 배우러 오겠느냐"며 거절했다. 그래도 김씨는 주민에게 일어 강의를 홍보했다. 한국인과 결혼한 조선족 새댁, 혼자 사는 할머니, 군대에서 입은 장애 때문에 직장을 구하지 못한 40대 등 15명이 모였고, 추씨도 마음을 돌렸다. 마용호(42)씨는 "80세가 넘어 결국 강단의 꿈을 이룬 선생님을 볼 때마다 나도 새 삶을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