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죽어도 아버지를 편하게 뵐 수 있겠어요"

"선고 기일이 잡히고 나서 일주일 동안 내내 가슴이 떨렸어요. 울기도 많이 울었고. 52년 전에 (사형) 선고하던 대법원이 또 선고한다니까 뭐 하나라도 잘못 나올까 봐 마음 졸인 거지…."

대법원이 지난 1959년 간첩죄로 사형당한 조봉암 전 진보당 당수에게 재심(再審)을 통해 무죄를 선고한 지난 20일 맏딸 조호정(83)씨는 "이제는 죽어도 아버지를 편하게 뵐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조씨는 21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아버지는 계획적으로 당했어요. 정적(政敵)을 이렇게 없애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오랜 세월 너무 많이 울어서 막상 선고가 나왔을 때는 눈물이 안 나왔어요. 이번 선고를 앞두고 하도 불안해서 선고 직전 사위가 준 진정제를 먹었죠."

조씨는 무죄 선고가 나자 곧바로 온 가족을 데리고 아버지가 묻혀 있는 서울 망우리 묘지를 찾아 술을 한잔 가득 따라 올렸다. '죽산조봉암선생지묘'라는 아홉 글자만 새겨진 비석 앞에서 조씨는 "이제는 비워둔 비문(碑文)에 글을 새겨 넣을게요"라고 말했다.

조봉암 선생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무렵 조씨는 신혼의 주부였다. 매일 같이 면회를 갔다.

이화여대 선배인 정부 고위 인사의 부인들을 찾아다니며 필사적으로 구명 운동을 벌였다. 조씨에게는 52년 전 대법원이 아버지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아버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던 날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날도 면회를 갔죠. 그런데 아버지가 면회를 안 하겠다고 했다는 거예요. 뭔가 불안했어요. 알고 보니 이미 (사형 집행이) 끝났다는 거예요. 재심 청구가 기각된 바로 다음날이었죠."

조씨는 엄혹한 세월을 보냈다. 한동안 경찰이 집에 새끼줄을 쳐서 사람들의 왕래를 막았다. 조봉암의 망우리 묘지에는 10년 넘게 기일마다 형사들이 지키고 있다가 추모객들이 몰려들면 해산시켰다고 한다. 조봉암은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제헌(制憲) 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지만 간첩으로 몰려 훈장 하나 받지 못했다. 조씨 가족은 일단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공적사항을 국가보훈처에 제출할 계획이다. 비문의 글귀는 가족회의를 거쳐 새길 예정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