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임원 박차고 나와 韓人 사회 껴안다

"테러범들이 납치한 비행기가 내 사무실이 있는 월가 60번지 25층 사무실을 스치듯 지나더니 세계무역센터 빌딩으로 날아갔어요. 직원들을 대피시키고 서둘러 뉴욕 A선 지하철을 탔는데 그게 세계무역센터 빌딩 밑을 지나간 마지막 열차였죠."

서울여상 출신으로 한국인 최초로 월가 본부장(managing director)까지 오른 최경희(58) 전 JP모건체이스은행 리스크관리 북미본부장은 10년 전 9·11 사건을 겪고 다음해 사표를 냈다.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제 미국사회에서 내가 받은 것을 돌려주고 동포들을 돕는 일을 하자고 마음먹었죠."

집안이 어려워 1974년 서울여상을 졸업한 최씨는 JP모건코리아에 취직했다가 미국으로 가 회계부서와 리스크관리부서를 거쳐 부사장과 본부장까지 수직상승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22년간의 월가 뱅커 생활을 접고 그가 택한 제2의 인생은 뉴저지 북부 웨스트우드의 비영리법인 파스캑밸리병원의 이사회 멤버였다. 금융전문가로 15명의 이사회에 합류한 최씨는 미국 최초로 한인 환자들을 위한 맞춤식 서비스인 한인메디컬 프로그램을 2003년 출범시켰다. "한인들이 미국 병원에 오면 말이 안 통해 고개만 끄덕이다가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돌아가는 일이 다반사죠. '몸이 욱신욱신 쑤신다'는 말을 영어로 하기도 힘들고, 미국 병원은 한국처럼 한 곳에서 다 치료받을 수 있는 시스템도 아니어서 병원 가기가 고통스럽죠."

그는 각 분야의 한인 의사 50명을 연결, 한인 환자를 위한 접수·진찰·진료 통역, 그리고 한식 및 택시서비스까지 묶은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했다. 한인 사회의 큰 호응을 받았을 뿐 아니라 병원의 새 비즈니스 모델로도 각광 받았다.

파스캑밸리병원은 무리한 확장으로 2007년 문을 닫았지만 이 프로그램은 뉴저지 버겐카운티에서 세 번째로 큰 홀리네임병원이 이어받아 지속되고 있다. 한인 의사는 70명으로 확대됐고 매년 20%씩 환자가 늘었다. 지난해 뉴욕 뉴저지 일대 2만7000명의 한인이 이 프로그램을 이용했다.

최씨는 이 프로그램을 총괄지휘하는 이사다. 지난해 무디스는 이 병원이 발행하는 채권에 등급을 매기면서 이 프로그램을 높이 사 '안정적' 등급을 부여했다. 이 프로그램의 메디컬 디렉터인 양희곤(49) 의사는 "한인 환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보면서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수단이 없었다"며 "병원 입장에서도 경영상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어서 이 프로그램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했다.

최 이사는 지난해 40만달러의 기금을 모으고 병원으로부터도 60만달러를 지원받아 한인을 위한 유방암 무료진단, B형간염 예방, 정신건강 진단, 무료 건강검진 등 캠페인을 벌였다. 올해엔 당뇨병 예방캠페인을 추가할 계획이다. 마이클 매런 홀리네임 병원장은 최 이사를 "한인 커뮤니티의 챔피언"이라며 신뢰감을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