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을 먹으며 경쟁자들의 연기를 여유 있게 지켜보고 있던 카자흐스탄 팬들은 텐이 얼음판 위로 올라오자 일제히 숨을 죽였다. 대회 전 오른 발목을 다쳐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던 텐이 링크를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화려한 점프와 회전 기술은 물론 그가 실수로 엉덩방아를 찧을 때는 함성보다 더 큰 탄식이 경기장을 채웠다. 관객 마흐자로프는 "데니스는 카자흐스탄의 자랑"이라며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해 조국을 빛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텐은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을 합쳐 208.89점을 받았다. 마지막 선수로 나섰던 무라 다카히토(일본)의 점수가 전광판에 206.88점으로 뜨자 경기장은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텐이 카자흐스탄 선수론 최초로 아시안게임 남자 싱글 챔피언에 오른 것이다. 그에겐 한국인의 피가 흘러 우리에게도 특별하다. 텐은 원주진위대 특무정교(特務正校·지금의 준위)로 근무하다 1907년 의병을 일으킨 민긍호(閔肯鎬) 선생의 후손이다.
민 선생은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진위대를 해산하려는 일제에 저항했다. 강원도 원주와 홍천, 횡성, 춘천 일대에서 용맹을 떨치던 그는 이듬해 적에게 붙잡혀 탈출하는 과정에서 일제의 총탄에 순국했다.
이후 부인이 어린 남매를 데리고 북만주로 가 안중근 의사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안 의사가 체포된 뒤 연해주로 피신한 가족은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모두 카자흐스탄으로 갔다.
텐의 할머니 김 알렉산드리아(67)가 민긍호 선생의 외손녀다. 현지에서 만난 고려인 한 에리크씨는 "텐의 존재는 고려인들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다"고 말했다.
알마티에서 태어난 텐은 어린 시절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엄마 옥사나(53)의 영향을 받아 음악을 했다. 2002년엔 카자흐스탄 소년합창단원으로 부산을 방문해 세계합창대회에서 준우승했다.
태권도를 하며 한국과 인연을 이어간 텐은 10세 때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했고 금방 소질을 드러내며 러시아로 유학했다. 2008~2009 국제빙상연맹(ISU) 주니어 그랑프리 우승은 텐의 명성을 한 단계 올려주었다.
지난해 1월 텐은 밴쿠버 올림픽을 앞두고 전북 전주에서 열린 4대륙 대회에 참가하며 한국에서 시니어 데뷔 무대를 가졌다. 4월엔 러시아 볼쇼이아이스쇼 팀에 속해 한국을 다시 찾았다.
텐은 경기 후 "한국은 제2의 고향과 같다. 한국 팬들도 내 금메달을 기뻐해 줄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그는 우승의 비결을 '행운의 돌'에 돌렸다. 전주 4대륙 대회를 마치고 원주의 민긍호 선생 묘소에 들러 가져온 돌이다.
"힘들 때마다 이 돌을 꺼내봐요.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전 반(半)은 한국인이고 반은 카자흐스탄인입니다. 한국에 들를 때마다 할아버지의 조국 팬들이 보내주신 뜨거운 성원을 늘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