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이야기] '생판 남' 독거노인 돌보는 주부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유정자(77) 할머니가 혼자 사는 낡은 한옥의 작은 방에 주부 강희선(48)씨가 양손에 보따리를 들고 아들 둘과 함께 들어섰다. 강씨가 풀어놓은 보따리에는 몇 시간 동안 우려낸 사골 국물 두 병과 떡국용 떡이 담겨 있었다. 유씨는 강씨에게 "왜 자꾸 이런 걸 가져와. 힘들게…"라며 강씨 손을 꼭 잡았다.

강씨 아들 윤준영(21·인하대 환경공학과 2년)씨와 석민(15·경희중 2년)군이 "할머니"라고 부르며 유씨 품에 안겼다. 석민군은 "할머니, 저 어제 스키장 갔다 왔어요"라며 스노보드 탄 이야기를 재잘거렸다. 준영씨가 거동을 못하는 할머니 다리를 주무르자 유씨는 "아유, 시원하다"며 환하게 웃었다.

유씨에게 강씨 모자(母子)는 며느리와 손자나 다름없다. 2010년 4월 동대문 종합사회복지관을 통해 만난 뒤 한 달에 2~3번 할머니를 찾아가 음식 장만과 이불 빨래를 한다.

강씨는 평범한 회사원 아내였다. 그가 독거노인 봉사에 나서게 된 것은 1994년 당시 4세이던 장남 준영씨가 병에 걸려 3년 6개월간 힘겨운 투병 생활을 한 경험 때문이다.

"준영이 간병을 하다 지쳐 성격도 나빠지고 건강도 악화했어요. 그런 제게 봉사활동 온 사람들이 힘을 주었어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격려해줬고 저는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나도 준영이가 나으면 힘든 사람을 도우며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후 준영군은 기적처럼 나았다. 강씨는 아이들과 함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다가 독거 노인을 돕기로 했다. 강씨는 "아이들이 어른 모시는 법을 배우게 하고 싶었고, 어르신들도 아이들을 만나면 좋아하실 것 같았다"고 했다.

강씨는 2005년부터 5년간 복지관을 통해 만난 강순옥(88·동대문구 전농동) 할머니를 모셨다. 강 할머니는 지난해 다시 만난 아들 내외가 모시고 갔다. 이후 강씨는 유씨를 보살피고 있다. 강씨가 24년간 모시는 시어머니 김기녀(87)씨도 며느리를 기특해한다. 김씨는 "며느리가 좋은 일 한다.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도와줘야지"라며 자랑스러워했다.

강씨는 "할머니들 찾아뵙는다고 음식 만들면, 시어머니께서 옆에서 음식 장만을 도와주신다"며 "어르신 입맛이 비슷할 것 같아서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할머니들을 찾아뵙는다"고 말했다. 남편 윤황중(51·회사원)씨도 "봉사를 시작한 이후 아내 성격이 더욱 밝아졌다"고 말했다.

결혼도 한 적 없이 평생 혼자 살아온 유씨는 강씨 모자를 만나는 게 유일한 기쁨이다. 유 할머니는 "내가 다리가 아파 잘 움직이지 못해 TV 말고는 사람 목소리 들을 기회도 거의 없는데 애 엄마랑 아이들이 올 때마다 기운이 나고 살맛 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