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와 배우 구분? 연기가 사업이냐 예술이냐지"

"요즘 인기 있는 젊은 후배들은 이미 재벌이야. 그러니 우리처럼 늙어서까지 연기할 이유가 없겠지. 하지만 연기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잖소. 스타와 액터(Actor·배우)는 쉽게 구분할 수 있어요. 더스틴 호프만이 미국에서 그렇게 화려한 스타는 아니라고.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 니로도 마찬가지. 하지만 알 파치노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연기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연기를 수익성 있는 사업으로 볼 것이냐, 예술로 볼 것인가. 그 관점이 스타와 배우를 가를 거요."

배우 이순재(76)를 만난 계기는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17일 개봉)였지만, 그가 영화 못지 않게 정열을 집중한 대목은 후배들에 대한 애정과 쓴소리, 그리고 자신이 평생 걸어온 길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젊은 시청자들에게 이순재는 TV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 순재'로 친숙하다. 하지만 배우 이순재의 출발은 1950년대 서울대 철학과 재학 시절 재건했던 서울대 연극회와 1960년대 이낙훈 여운계 오현경 등과 함께 만든 극단 실험극장과 민중극장이다. "국어사전 펴놓고 대본 연구하고 발성 연습했던 시절"이라고 했다. 당시 연극 무대에서의 연습과 훈련은 지금까지 이순재가 생산한 1000편 넘는 드라마와 100편 넘는 영화의 씨앗이 됐다. 그는 고다르, 샤브롤, 트뤼포 등 영화가 예술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 1950~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배우는 평생 해야 하는 직업이라는 것, 그리고 스스로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으로 산다는 것을 강조했다.

요즘 젊은 후배들 이야기로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는 칭찬부터 했다.

"소재(素材)로서는 환상적이에요. 영민하고 똑똑하고 감성도 풍부하지. 우리 때보다 훨씬 낫다고. 하지만 문제는 연기가 뭐냐 하는 거요. 요즘 TV 드라마나 영화는 난해한 작품이 별로 없어요. 사실 그 정도 대본의 희로애락 표현은 요즘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거야. 다들 똑똑하니까. 그래서 작품 같이한 후배들, 연기에 욕심 있는 후배들에게는 별도로 얘기합니다. 발성과 대사 훈련 따로 받으라고. 이미 스타라서 교육받는 게 창피하면 몰래라도 배워라. 어디 미국 가서 액터스 스쿨이라도 다니라고 말이죠."

그의 영화 데뷔는 45년 전 정진우 감독의 '초연'(1966). 연극과 TV에서 활약을 펼치다 발탁된 경우였다. 그는 "아마 신인배우로 응모했다면 떨어졌을 거다. 키도 이렇게 작으니…"라며 싱글싱글 웃었다.

이번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이순재는 우유 배달 할아버지 만석 역을 맡았다. 리어카를 끌며 파지(破紙)를 파는 송씨 할머니를 사랑하는 노인이다. '모두들 괜찮아요'(2005) '파랑주의보'(2005) '굿모닝 프레지던트'(2009) 등 최근 몇 편의 영화에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한 적은 있지만, 주연은 허준 역을 맡았던 최인현 감독의 '집념'(1976) 이후 처음이다. 대략 35년 만이다. 게다가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 그는 "주연배우 시켜준다고 해서 불문곡직(不問曲直) 한다고 했다"며 파안대소했다.

TV와 스크린의 경계가 희미해진 데다 50년 넘는 연기 인생에서 뭐 그리 대수일까마는 그는 마냥 유쾌하고 진지했다. "사람의 정(情)에 관한 이야기요. 그 동안 노인들을 다룬 영화가 '워낭소리'나 '죽어도 좋아'처럼 다큐멘터리 시각에서 접근했다면, 이 영화는 현란한 영상 없이 쉽고 친절하게 사람들의 따뜻함을 전달하지. 20대 관객 위주인 한국 영화시장에서 어려운 시도였는데, 일단 극장을 찾는다면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자주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아낸다. 앞에 앉은 그의 목 주름이 연륜 깊은 나이테처럼 곡선을 그렸다. 아름다웠다.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노인들의 사랑을 따뜻하게 담아낸 멜로 드라마. 만화가 강풀의 동명 만화가 원작이다. 주연배우는 이순재 송재호 윤소정 김수미. 20대 관객이 대다수인 한국 대중영화시장에서 주연배우 평균 연령이 69세인 '용감한' 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