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가 끝날 때… 한 여인만 웃고 있으리

20년간 세계를 지배해 왔으니 '독재자' 맞다. 철권통치의 절반 이상은 '남의 나라'서 이뤘고 그 상황은 아직도 계속 중이다. '철녀(鐵女)'란 별명의 그녀 이름은 루이나이웨이(芮乃偉·48) 九단. 고국 중국을 떠나 1999년 한국에 닻을 내린 이후 12년 동안 따낸 국내 타이틀 수가 여성기전만 19개에 이른다. 8할이 넘는 점유율이다. 혼성기전 우승 2개는 별도다. '한국 여성 바둑은 루이에 의해 발전했고 루이 때문에 침체에 빠졌다'는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그 엄혹한 '겨울공화국'이 작년 10월부터 미세하나마 균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류기성전 본선 8강전 첫 판서 신예 김윤영에게 뜻밖의 일격을 맞고 탈락한 것. 당시 21세의 二단에 불과했던 김윤영은 이 회심의 일탄(一彈)을 발판으로 쳐 올라가 우승까지 했다. 3대 여성기전을 독점해오던 루이를 전관왕으로부터 내려오게 한 충격적 사건이었다.

그 직후 아시안게임이 11월 광저우에서 열렸다. 바둑 종목서도 석권 야심에 불탔던 중국은 '우승 청부업자' 루이를 불러들였다. 하지만 그녀는 최종 결승전서 패배, 조국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여자단체전 금메달을 한국에 넘겨주는 치명적 1패였다.

그러나 루이나이웨이는 여전히 여류명인 겸 여류국수다. 3개 권부(權府) 중 2개를 보유 중인 최고권력자 루이가 2월 한 달 동안 잇달아 시험대에 오른다. 10일부터 조혜연 九단과의 제12기 여류명인전 도전 3번기, 22일부터는 김윤영 三단과 맞설 제16기 여류국수전 결승 3번기가 대기 중이다.

조혜연(26)은 루이 입장에선 누구보다 끈질긴 '반체제 세력'이다. 11세에 입단해 최고 엘리트 과정을 밟아온 조혜연은 계속되는 좌절 속에서도 이방인 독재자에 줄기차게 항거해 왔다. 둘이 치른 결승(도전기 포함)은 무려 14회에 달했고 루이가 12회, 조혜연이 2회 우승했다. 총전적은 32승 16패로 루이가 앞서 있다.

조혜연은 이번 여류명인전서 이슬아·김윤영·박지은을 제치고 루이를 향한 15번째 도전장을 따냈다. 학업(고려대 영문과) 병행에서 오는 고충, 종교적 신념에 따른 선별 출전 등 곡절을 겪어온 조혜연의 끝없는 집념이 이번엔 어떻게 나타날지 주목된다.

김윤영은 여류국수전 본선서 이민진·이슬아·조혜연을 연파하고 '여제' 루이와 결승전서 만나게 됐다. 루이와의 통산 전적은 아직 1승 3패로 열세. 작년 여류기성전 결과가 이변이 아니었음을 입증해야 하고, 2008년 제3기 여류기성전 결승 패배의 아픔을 되돌려주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다.

조혜연과 박지은(28) 2명 정도만 '저항세력'으로 꼽히던 여류바둑계는 최근 1년여 사이 박지연·문도원·이슬아·김미리·김윤영 등 20세 전후 새 얼굴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새로운 지형도가 형성돼 가고 있다. 단골 '운동권 핵심'인 조혜연과 '신인 저격수' 그룹을 대표한 김윤영의 루이를 향한 협공은 '2월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나도 어떻게 될지… 정말 모르겠어요." '철녀'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한 말이다. 얼마 전까지 보여주던 "이제 난 끝났다" 식 겸손모드가 아니다. 천하의 루이도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체제 지속'과 '민중봉기' 사이에서 점괘는 좀체 안 나온다. 작년 다승(多勝) 부문서 조혜연(32승)과 김윤영(31승) 모두 루이(28승)보다 약간 앞섰지만, 2월 랭킹은 루이(70위) 조혜연(80위) 김윤영(131위) 순으로 발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