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가족 사진첩에 '우리 역사'가 있었네

남자애들은 박박 깎고 여자애들은 앞머리를 일자로 자른 한결같은 헤어스타일, 카메라 앞에만 서면 누구나 영화배우가 된 듯 먼 산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촬영한 기념사진, 50년 된 청첩장….

인류학자 강신표(75) 인제대 명예교수는 최근 국립민속박물관이 펴낸 사진집 '배움의 길, 기록을 따라가다'를 펴들고 흐뭇한 표정이었다. 이 책에는 강 교수와 부인 김봉영(72)씨의 어린 시절부터 신혼 모습까지 사적(私的)인 사진 210여점이 수록됐다. 2009년 강 교수의 자료를 받은 국립민속박물관은 이번에 사진집과 함께 1988년 서울올림픽 문화학술운동 결과를 정리한 연구보고서 '세계와 함께 나눈 한국문화' 등 두 권의 책으로 펴냈다.

'배움의 길…'에 실린 사진들은 우리가 어쩌면 영원히 우리 곁에 있으리라고 착각하고 소홀히 여기다 이제는 잊어버린 모습들이다. 귀퉁이에 단기(檀紀)와 서기(西紀)가 섞여 적혀 있는 사진들엔 '원족(遠足·소풍) 기념'이란 글귀가 쓰여 있다. 시차(時差)를 두고 수학여행을 간 안압지 풍경도 흥미롭다. 판자로 얼기설기 지은 경기고의 부산 피란 교사(校舍), 고적대(鼓笛隊)의 거리 행진, 학예회 그리고 그 시절 각종 이벤트에서 빠지지 않았던 가장행렬(假裝行列)과 매스게임까지. 경남 통영 '의령약국' 손자로 자란 강 교수와 강원도 춘천에서 자란 부인 김씨의 '삼칠일' 사진부터 백일·돌 사진을 비롯해 학교에 다니며 촬영한 흑백사진들은 일제 강점기, 광복, 6·25전쟁, 산업화 과정 등 한 시대의 역사를 보여준다. 집집마다 서랍 속에 쌓여 있을 개인적인 사진들이 이렇게 훌륭한 민속·인류학적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이 책은 웅변으로 보여준다.

강 교수는 "할아버지, 아버지가 한약방을 하신 것이 결과적으로 저를 인류학자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약재를 담는 종이 여백에 환자를 진단하고 처방한 내용을 적은 것을 버리지 않고 모으던 집안 분위기가 하찮은 자료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늘 메모하는 습관을 길러줬다는 것이다. 실제로 책에는 그의 1954년 서울대 수험표를 비롯해 청첩장, '삼가 하나님께 아뢰나이다'로 시작하는 결혼식 고천문(告天文), 신혼여행지에서 쓴 비용내역까지 소상하게 실려 있다. 7일 인터뷰 자리에서도 그는 앉자마자 녹음기와 카메라를 꺼내 자신이 인터뷰하는 모습을 '취재'했다.

어린 시절 무엇이든 모으는 습관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피란 시절인 1951년 부친이 사준 라이카 카메라다. 강 교수는 "아버지가 사주셔서 저는 가격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대학생 때 팔았더니 그 돈으로 헌책방에서 원 없이 책 사볼 수 있었다"고 말할 정도이다. 그 카메라로 촬영한 수복 후 서울 명동성당 뒤편의 공사장 모습도 책에 실려 있다. 그는 "보건체조, 가장행렬 등 서구의 다양한 문화가 일본을 통해 일제 강점기 이후에도 한국에 얼마나 많이 남아 있었는지 새삼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맡겨야 한다"며 "지금 가지고 있는 자료도 모두 맡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