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민화는 신·인간 잇는 역할 세계 명화와 견줄 만하죠"

'민화(民畫)'를 지칭하는 용어는 매우 다양하다. 서민화, 민중화, 민체화, 민속화, 민족화, 장식화 등의 용어 외에 근래엔 '공예화'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도 출품되고 있다. 이 모든 게 민화의 다른 이름들이다. 그렇다면 민화란 대체 무엇일까.

"저도 30여년간 민화를 그리고 있지만 좀처럼 뚜렷하게 용어 정립이 되지 않더군요. 에밀레박물관 고(故) 조자룡 관장께서 민화의 개념을 알려면 먼저 민(民)에 대한 개념부터 정립해 볼 것을 권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금권사회에서는 돈 많은 부자가 왕이요, 가난한 무리들은 '민'이요, 학력사회에서는 지식층 학자가 왕이요, 그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민'이라는 얘기죠. 또한 신력(神力)세계에서는 무당이 왕이라 하니 사회 구성원 중 극히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국민들은 모두 민(民)이므로 민화는 즉 국민 모두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했습니다."

민화박물관 윤열수 관장은 민화를 '꾸밈없이 살아온 서민의 삶 속에서 태어난 우리 겨레의 신화와 종교, 우리의 정신이 깃들어져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고 정의했다. 민화는 민족의 가장 본질적인 의식과 정신문화가 담겨 있는 그림으로 인정받고는 있지만, 막상 미술 분야에서는 적극적으로 연구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민화장 서경식은 1931년 서울 관수동에서 출생하여 대법원 공무원이었던 부친 서승근과 동아일보 고재욱 사장의 딸 고재남의 2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생활은 여유가 없었으나 검소하고 엄격한 가정교육 속에서 서울 숙명여고를 졸업하였다.

서경식은 어려서 그림에 소질이 있어 숙명여고 학창시절 홍일표 선생으로부터 그의 오연한 표현력과 독특한 작품세계를 전수받아 1948년 최연소의 나이로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 서양화 부분에 입선, 화가로서의 부푼 꿈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6·25 전쟁과 결혼으로 타고난 소질을 마음껏 펼칠 수 없었다.

1982년 우연히 본 TV가 그녀의 인생을 바꿨다. 민화에 관한 방송이었다. 언론사 문화센터 등을 다니며 배우기 시작했다. 문화센터 강사였던 고(故) 육지수 선생의 눈에 띄어 특별지도를 받으며 그녀는 접었던 꿈을 다시 펼치기 시작했다. 벌써 30년째다. 올해 팔순을 맞은 그녀는 지치기는커녕 민화 그리기와 민화에 담긴 이야기, 역사 정립에 시간가는 줄 모르며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각지에서 '민화열풍'이 불고 있지만 서경식이 보는 근래의 민화는 '정말 이건 아니올시다'이다. 민화는 아름다운 색깔을 얼마나 잘 표현하느냐가 관건인 고난도의 기예가 필요한 작업인데, 요즘의 민화들은 거의가 중국·일본화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솔한 깊이가 있는 민화의 색채는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마르크 샤갈·마티스, 인상주의 화가 반 고흐의 색감에 뒤질 게 전혀 없다. 프랑스 파리 기메박물관을 비롯하여 영국·네덜란드·러시아·독일 등 문화예술의 선진국이라 자부하는 유럽 각국의 동양미술관, 박물관에 소장된 민화가 바로 그 점을 입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회화(繪��)를 다루는 평론가들에게 민화는 애초부터 비평의 대상이 아니다. 민화가 슬픈 건 그런 이유에서다.

서경식은 말을 이었다. "'미륵반가사유상'보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을 최고의 명품으로 보는 건 사대주의적 착각 때문이다. '미륵반가사유상'은 고요와 평안의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생각하는 사람'은 무표정의 무거운 고요만 감돌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지혜로운 예술 비평가들의 평가 아닌가."

서경식의 민화작품 중 가장 으뜸으로 평가받는 분야는 인물화다. 사실 인물화를 그린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죽은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표현과 감정을 너무 살리다 보면 그림 속의 인물이 형편없는 '졸품'으로 변형될 수도 있다. 그래서 더욱더 조심스럽다. 그의 인물화는 대구 계명대학교 박물관과 가회박물관 등에서 소장하고 있어 민화계에선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는 셈이다.

서경식은 말한다. "민화계가 제대로 가려면 작가의 내면적 사상과 철학이 번듯하게 정립되어 그대로 그림에 정착되어야 하며, 유화나 수채화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힘이 없지만 민화는 신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강렬한 흡인력이 있기에 세계 어느 곳에 걸어놔도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요즘 민화를 가르친다면서 밑그림 위에 색칠만 해대는 민화 교육은 기초교육에서 그쳐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이렇게 잘못 '숙달된' 민화 장인이 나오면 한국 민화의 미래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민화인들의 명예마저 땅바닥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 고유의 그림, 민화(한국미술화)가 천시받고 있지만, 국가의 지원은 초라하다. 국가지정문화재로 불화장 2명, 단청장 3명, 시·도무형문화재로 10여명이 지정됐을 뿐이다. 민화를 배우는 제자들에게 면목이 서지 않는 대목이다.

그래도 할 사람은 열심히 하고 있다. 그간 서경식 민화장에게 사사했던 박찬민 (사)한국민화협회 회장은 궁중화의 복원을 위해 도화원을 협회와 공동으로 설립하여 궁중화 정립에 나서고 있으며 박순자·노윤숙 등은 민화계의 중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요즘 서경식은 민화 중 까치와 호랑이를 소재로 한 것과 목단을 그려 넣은 병풍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인물화에서 벗어나 또 다른 도약을 시도하는 중이다. 팔순의 나이도 그의 열정을 가로막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