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칼을 버리고 붓을 잡았나

"호가 무엇인가." 고종이 채용신에게 물었다. 그가 답했다. "석지(石芝)입니다." 임금은 말을 이었다. "너의 거처가 부안현에 가까운데, (그곳에는) 채석강이 있지 않으냐? 네 성이 이미 '채'이니, 이제 호를 '석강(石江)'이라 한다면 저 채석강과 음이 우연히 합치되어 그 아름다운 이름과 비슷하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1902년 고종은 임금 초상을 그리는 '어진(御眞)화사' 채용신에게 호를 내렸다. 각별한 애정이 느껴진다.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1850~1941)은 조선의 마지막 초상화가다. 원래 칼을 쓰는 무관(武官)으로 과거에 급제한 그는 중인 출신의 도화서 화원들이 어진 제작을 맡던 관례를 깨고 주관화사(主管畵師)로 발탁되면서 조선 초상화의 새로운 전통을 열었다. 채용신처럼 '마음까지 그린다(傳神寫意)'는 평가를 듣는 화가는 많지 않다.

석지 채용신의 사후 70주년을 맞아 그의 인생과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특별전 《석지 채용신, 붓으로 사람을 만나다》가 15일 국립전주박물관(관장 곽동석)에서 개막했다. 미공개작품 9점을 포함해 '고종 어진' '영조 어진' 등 채용신의 대표작 40여점을 선보인다.

대대로 무관을 지낸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이미 22세에 흥선대원군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이름을 떨쳤다. 1886년 37세의 늦은 나이로 무과에 급제해 관직을 지내고 50세에 물러난 후 전주로 낙향했는데, 이때 어진을 그리라는 명을 받는다. 채용신은 1900년 두 차례에 걸쳐 태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의 어진을 그렸으며, 그의 솜씨를 흡족히 여긴 고종의 명을 받아 고종의 어진뿐 아니라 기로소(耆老所) 신료 16명의 초상까지 제작했다.

전시장 곳곳에서 무수한 붓놀림을 통해 얼굴의 주름 하나, 터럭 한 올까지 묘사한 그의 야무진 손끝을 볼 수 있다. 털모자를 쓴 면암 최익현(1833~1906) 초상화는 굵게 잡힌 주름, 굳게 다문 입술 등 노년 의병장 최익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채용신은 1906년 전주로 낙향한 이후엔 본격적으로 초상화 주문제작을 시작했는데, 애국지사와 항일의병의 초상을 주로 그렸다. 호남 기호학파의 거두이자 항일운동가였던 간재(艮齋) 전우(1841~1922)의 초상화도 눈길 끄는 작품이다.

채용신은 '사진술'이라는 당시 새로운 기술을 초상에 반영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 초상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서양화법과 사진술을 받아들여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는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했다. 1925년에 그린 서병완 부부 초상을 보면 동공에 조명이 반사되고, 콧등에 명암을 넣는 등 입체적 표현이 뚜렷하다.

처음 공개되는 중국 촉나라 장수 관우 초상화(전북대박물관 소장)는 황룡포를 입고 어좌에 앉은 모습이라 흥미롭다. 관우의 얼굴과 면류관, 오른팔과 무릎에 갑옷을 그려 넣은 것을 빼면, 원광대 박물관 소장의 고종 어진과 도상이 거의 흡사하다. 권혜은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배경에 그려진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해와 달, 다섯 봉우리를 그린 병풍) 중 관우 얼굴에 가려져 있는 가운데 주봉(主峰)의 밑그림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고종어진을 제작하다 관우 초상으로 변경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초상화 외에도 '무이구곡도 10폭 병풍' 등 산수·화조·영모·무신도에 걸친 다양한 장르의 그림들이 선보여 채용신의 작품세계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전시는 3월 27일까지. (063)220-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