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내 인생] 한전 발전소장에서 조각가로 변신한 신성현(63)씨

어린 시절 나는 '깎는 아이'였다. 분필을 면도칼로 깎아 친구 얼굴을 만들고 마을 어귀 황토절벽에 커다란 사람을 새겼다. 청소년기를 지나며 조각가의 꿈이 자라났지만 밥벌이의 책임을 내던질 순 없었다. 자존심 강한 어머니가 울면서 집집이 쌀을 꾸러 다니던 기억, 그 상처는 깊었다. 아무리 미술이 좋아도 가난까지 감내할 정도는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967년 한국전력에 입사했다. 바지런 떨며 살았던 시골(고향인 충남 서산) 습관 그대로 회사 일을 했더니 평판은 나쁘지 않았다. 강원도 화천수력발전소에서 시작해 들어가기 어렵다는 서울 본사로도 진출했다. 결혼을 하고 두 아들을 낳아 길렀다. 새벽같이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는 나날이 반복됐다. 시간은 허겁지겁 흘렀다.

미술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나와 다시 마주친 건 36살 때였다. 회사 내에 새로 만들어진 서예 동아리가 눈을 끌었다. 붓을 잡으니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매일 출근 전 1시간, 퇴근 후 1시간 동안 연습을 하면서 붓놀림의 즐거움에 빠졌다.

1990년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건설 현장에 부임했다. 어느 주말, 가족들과 나들이차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온양 민속박물관에 구경을 갔다. 오롯한 떡살, 촘촘한 참빗, 반반한 사발…. 평범한 사람들이 만든 물건들인데도 수백 년 동안 이렇게 전해 내려왔다는 게 기특했다. 대가(大家)의 작품이 아니면 흔적조차 없어지는 서예보다 오래도록 남을 물건을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일었다. 어린 시절 조각가의 꿈이 고운 작품들 위에 겹쳐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방구에서 조각도(刀)를 한 벌 샀다. 동네에서 얻어온 나무를 놓고 깎기 시작했다. 무얼 만들까 생각하다가 성당에서 흔히 보아온 '피에타상'(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상)으로 결정했다. 나는 그 무렵 가톨릭에 입교한 상태였다. 약 100일이 지나서 완성된 첫 작품은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어린 시절의 열정이 40년 만에 마음 한쪽에서 다시 꿈틀대 가슴이 뛰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조각을 취미로 삼았다. 전문 교육을 받을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임지 인근에 컨테이너 박스를 갖다 놓고 만들고 또 만들었다. 귀동냥으로 목공 도구도 사들이고 재료 구입처도 알아냈다. 강원도 영월화력발전소장 재직 시절,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조각가를 찾아갔다. 영월 국제현대미술관 박찬갑 관장은 내 작품을 보더니 "나쁘지 않다"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격려해줬다. 무작정 찾아간 강원대 미술학과 양재건 교수도 여러 가지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문을 두드리니 의외로 도움이 쉽게 찾아왔다. 은퇴할 시기가 다가오면서 제2의 인생을 조각에 걸어보고 싶다는 결심이 섰다. 강원도 양양 양수발전소장으로 있던 동료의 소개로 은퇴 후 살 집을 양양에 마련했다.

그 후로는 회사원 생활이 끝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영월을 떠나 경기도 청평양수발전소장, 울산 영남화력발전소장을 거치면서 주말마다 조각 활동을 계속했다. 2004년엔 서울 삼성동 한전 본사에서 조촐한 전시회를 열었다. 30여 작품 중 10점이 팔렸다. 재료 값은 빠질 정도의 돈이 들어왔다. 점점 신이 났다. 2006년 58세의 나이로 은퇴하자마자 양양으로 내려왔다. 조각가로서 본격적인 제2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요즘 나의 생활은 뜨겁다. 그리고 단순하다. 새벽 6시쯤 일어나 한 시간 정도 오랜 습관인 성경 필사(筆寫)를 한다. 이어 7시부터 한 시간가량 집 주변을 정리한다. 도시의 아파트와 달리 시골집은 조금만 게으름을 피우면 금세 너저분해진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하고 서너 시간, 점심 식사 후 서너 시간 조각에 몰입한다. 그런 뒤 저녁 먹고 기도하고 책 읽고 묵상하고 잠자리에 든다.

그렇게 만든 작품이 지금까지 총 100여점. 대부분 종교적 장면이나 우리 고유의 민속을 담은 작품이다. 2008년과 2010년 두 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30여점의 작품을 팔았다. 미술협회 회원으로 등록해 많은 회원전에도 참여한다. 자연스레 제2의 직업을 얻었고 프로 조각가 소리를 듣게 됐다. 한전에서 39년 동안 일한 대가로 받는 연금과 만기 된 보험금으로 생활비를 쓴다. 두 아들은 어느새 성인이 돼 직장에 자리를 잡았으니 알아서 잘 생활할 것이다.

'조각을 전공하고, 조각가의 인생을 살았으면 행복했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뒤늦게 시작했는데도 이 정도 실력을 갖췄으니, 처음부터 조각을 했더라면 어쩌면 꽤 성공했을지 모른다는 상상에 혼자 우쭐해 하기도 한다. 하지만 먹고살 걱정에 늘 초조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고개가 절로 저어진다.

평생 밥벌이에 시달려 진정한 꿈을 버려야 했다는 이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 꿈이 밥벌이가 됐다면 역시 그만큼 고단했을 거라고. '전직(前職) 누구누구'에 집착하며 그저 아프지 않게 시간 보내는 데 만족한며 인생 후반기를 보내지 말고 바로 그 지난날의 꿈을 이제 마음껏 누리며 살아보라고. 전직 월급쟁이에게 은퇴 후 시간은 '인생의 정리기'가 아니다. 잊어야 했던 마음속 꿈을 향해 마지막 승부수를 던질, 화려하고 가슴 뛰는 '나의 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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