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물가 잡으려다가 중소기업 다 잡겠네"

음료 제품을 만들어 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 등 대형마트에 PB상품(대형마트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브랜드)으로 납품하는 중견 식품회사인 R사. 이 업체가 원료로 쓰는 대두나 검은콩 가격은 지난해 7월과 비교해 50~100% 이상 올랐다. R사는 이달 초 대형마트에 제품값 10% 인상을 요구했지만 단번에 거절당했다.

"정부가 물가 잡겠다며 제품 가격을 하나하나 감시하고 있는데 납품가를 어떻게 올려주느냐"는 게 대형마트의 거절 이유. R사 김모 상무는 "정부가 사실상 가격을 통제하면서 원래 영업이익이 적은 중소기업은 죽을 맛"이라며 "물가 잡으려다 중소기업을 잡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물가 안정을 위해 완제품 가격 인상을 억제하자, 대기업과 거래하는 중소기업이 원자재값 상승에도 불구하고 납품가격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여기다 물가 안정을 위해 당국이 금리를 올리고, 환율은 떨어지고 있어 중소기업들이 삼중고(三重苦)에 시달리고 있다.

◆원자재값 상승에도 납품 가격은 제자리+

대기업에 포장용 종이상자를 판매하는 A사는 지난 14일 모 식품회사 입찰 경쟁에 참여했다. A사는 이 식품회사에 과일박스 크기의 종이상자를 1개당 980원에 판매하고 있지만, 이번엔 40원 낮은 940원을 입찰 가격으로 써냈다. 식품회사가 자신의 생산비용 절감을 위해 종이상자 납품가 인하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A사 관계자는 "폐지 가격이 지난해 상반기에 t당 18만원이었는데 지금은 23만원까지 올랐다"며 "지금은 물건을 팔면 오히려 손해가 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과자류를 생산하는 K제과도 설탕 가격이 최근 20% 정도 올랐지만, 대형마트 납품단가는 한 푼도 올리지 못했다. 이 업체 유모 과장은 "작년 12월 가격 협상 때 올해 2월부터 가격을 10% 올리기로 했는데, 최근 '없었던 일로 하자'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환율은 내리고 금리는 오르고… 수출 中企 채산성에 빨간 불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에서 산업용 포장비닐 생산업체를 운영하는 최모 사장은 올해 예정했던 100억원의 설비 투자를 포기했다. 은행에서 60억원을 빌려 투자할 계획이었는데, 은행이 이전에 대출해 주던 금리보다 0.5%포인트 높은 8.1%의 금리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최 사장은 "이자가 올라 한 달 이자 비용만 1000만원 정도 추가 발생한다"며 "설비 투자를 무기한 연기한 상태"라고 말했다.

중소기업 대출 금리는 지난해 말과 비교해 최근 0.5%포인트 상승했다.

환율 하락도 수출 중소기업엔 달갑지 않다. 셋톱박스 생산업체인 E사는 최근 남미의 한 방송업체 입찰에 참여했다가 중국 업체에 밀려 수주에 실패했다. 가격이 중국 제품보다 10% 정도 비싼 게 패인이었다. E사 관계자는 "환율만 작년 말 수준이었어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고 말했다.

작년 말 달러당 1150~1160원 선을 유지하던 환율은 17일 1120원으로 떨어진 상황이다. 환율이 하락할 경우, 제품 수출 가격은 올라가고 가격 경쟁력은 떨어진다. 또 달러로 받은 수출 대금을 원화로 환산할 경우, 금액이 줄어들어 기업 채산성도 악화된다.

산업연구원 주현 박사는 "정부의 거시 경제정책에서 일부 중소기업의 피해는 불가피한 상황"이라며 "정부로서도 중소기업을 위한 마땅한 수단이 없어 중소기업 피해가 지속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