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챈들러는 아내와 함께 묻히길 원했다"… 열혈독자들, 52년 만에 합장(合葬) 이끌어

미국의 유명한 범죄 추리소설가인 레이먼드 챈들러(Chandler· 1888~1959)가 사후 52년 만에 아내 시시(Cissy)와 합장된 사연이 미국인들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챈들러는 평생 사랑했던 아내가 1954년 사망하자 상실감을 견디지 못하고 알코올중독자가 됐다가 5년 뒤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의 묘는 지척에 있다. 그런데도 합장되지 못한 것은 그가 술독에 빠져 합장 의사를 명확히 밝힌 유언장을 작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챈들러의 열혈독자들은 수년 전부터 "아내를 사랑했던 챈들러가 생전에 분명히 합장을 원했을 것"이라며, 이를 밝힐 정황 증거들을 찾아다녔다. LA타임스는 "비록 문서로 된 유언은 없었지만 챈들러 독자들은 작년 샌디에이고 지방법원으로부터 합장 승인을 받아 행사를 준비해 왔다"고 전했다.

합장식은 밸런타인데이인 지난 14일 샌디에이고의 마운트호프 묘지에서 거행됐다. 영국 가디언 인터넷판은 17일 "부부의 유해가 고적대의 축하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재회했으며, 합장은 장례식이라기보다 기념식 같았다"고 했다. 52년 전 챈들러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이들도 다시 나타나 부부의 재회를 지켜봤다.

챈들러는 범죄 현장을 냉혹하고 비정하게 묘사하는 '하드보일드 느와르'의 대가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소설 밖에서는 18세 연상의 아내를 열렬히 사랑한 로맨티스트였다. 1954년 후기 대표작 '기나긴 이별'을 발표하던 무렵 아내가 죽었고, 그는 젊은 시절 그를 괴롭혔던 알코올에 다시 빠져 끝내 정상 생활로 돌아오지 못했다.

챈들러는 35세이던 1924년 시시와 결혼했다. 당시 53세 이혼녀였던 시시는 챈들러와 결혼하려고 나이를 43세라고 속였을 만큼 그와의 결혼을 간절히 원했다고 한다. 음주와 잦은 결근으로 회사에서 쫓겨나기를 거듭했던 챈들러는 시시와 결혼하면서 안정을 찾았고, 1939년 첫 장편 '빅 슬립'이 큰 성공을 거두며 유명 작가로 거듭났다. 챈들러는 자신이 쓴 모든 소설을 아내에게 먼저 읽혔다고 한다.

아내가 죽자 그는 시시를 "30년간 내 가슴속에서 뛰었던 나의 심장"이라며 슬퍼했다. 이번 합장으로 시시의 유골 항아리는 남편의 관 위에 심장처럼 올려져 안치됐다고 외신들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