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길상사 주지

10년 전 딱 이맘때였다. 봄의 전령은 처마밑 낙수 소리로 승방을 기웃거렸고, 성북동 길상사는 아직 설안거(雪安居) 중이었다. 길상사 회주로 계셨던 법정 스님은 "신앙을 갖되 신앙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며 "글쓰기도 삶의 한 부스러기일 뿐"이라고 했다. 당신의 '큰스님' 칭호에 대해 묻자 "큰스님이 있다면 작은스님도 있단 말이냐. 대추기경, 소추기경 소리 들어봤느냐"며 화를 내셨다. 그날 구들방 윗목엔 맏상좌 덕조 스님이 앉아 있었다.

▶지병이 깊어가던 법정 스님은 2009년 덕조 스님이 9년 전부터 맡아오던 길상사 주지 자리에 동생뻘인 덕현 스님을 앉혔다. 법정의 일곱 상좌 중 덕현 스님은 주로 수행만 해왔기 때문에 다소 뜻밖이라는 신도들이 있었다. 이후 길상사는 몸살을 앓았다. 전·후임 주지를 따라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이듬해 봄 법정은 입적하면서 덕조에게 "10년간 불일암에서 오로지 공부에 매진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젠 모두 화합(和合)이 되나 했다.

▶지난 일요일 덕현 스님이 돌연 '그림자를 지우며'라는 글을 남기고 주지를 사퇴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신도들도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덕현 스님은 그간 진통이 깊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청정한 승단에 아직 "충분히 진화(進化)하지 않은 시스템들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유입됐다"며 정치꾼들이 대중을 상대로 속임수를 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길상화 보살님의 불심과 회주 법정 스님의 고결한 정신이 깃든 도량"을 떠나는 게 가슴 아프다 했다. 길상화(吉詳華)는 요정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김영한의 법명이다. 그녀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시인 백석의 평생 연인이었다. 1997년 길상화 보살이 시가 1000억원에 이르는 대원각 땅을 법정에게 시주했을 때 누가 "아깝지 않으냐"고 묻자 "그 돈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했다던가.

▶오는 28일은 음력으로 법정 스님 1주기다. 길상사 홈페이지는 또다시 소란스럽다. 덕현 스님이 밝힌 '반대파 명단'에 대해 시비도 많고 "무슨 면목으로 법정 추모식을 거행한단 말인가" 하는 한숨도 나온다. 법정은 살아생전 "믿을 게 없어서 중들 말을 믿어?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중놈 말을 어떻게 믿어…"라며 역설의 가르침을 주셨다는데, 봄은 저렇게 또 무작정 돌아오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