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내 인생] 할인매장 판매원에서 '시니어모델' 된 최인순(62)씨

어린 시절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은 라디오 드라마 청취였다. 서울 외곽의 장위동에 살던 나는 동네 스피커로 틀어주는 라디오 속 드라마에 매혹됐다. 고등학교 때부터였던가, 주변 사람들에게 "넌 목소리가 또렷하고 발음이 좋으니 성우를 해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라디오에 나오는 대사들을 따라 하며 성우의 꿈을 키웠다. 한 동네에 흑백 TV가 한 대 있을까 말까 하던 시절, "성우가 되라"는 말은 요즘 "배우를 해보라"는 말과 동급이었다. 화려한 연예인, 갈채 받는 성우의 꿈을 꾸며 여고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어떻게 성우가 되는지 알아보려고 방송국에 무작정 찾아갔다. 한 달 후 성우 공채가 있다는 걸 알아내고 뛸 듯이 기뻤다. 시험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나는 장위동에서 방송국이 있던 정동까지 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특별한 날'엔 택시를 타고 가려고, 한 달 동안 한푼 두푼 돈을 모은 터였다. 그러나 시험 보러 가는 길은 꽉 막혀 있었다. 택시는 신호마다 걸렸고 요금은 계속 올라갔다. 중간쯤인 안암동 부근까지 갔을 때, 택시 요금이 내 지갑에 있는 돈을 넘어섰다. 택시 기사에게 있는 돈을 다 주고 차에서 내려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왔다. 스무 살도 되기 전 성우의 꿈은 그렇게 사라진 듯했다. 다시는 같은 길을 꿈꾸고 싶지 않을 정도로, 상처가 깊었다.

그 후엔 명동의 한 백화점 매장에 취직해 토산품을 팔았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물건을 파는 일이 생각보단 꽤 재미있었다. 친구들과 돈을 모아 작은 양품점도 냈다. 옷 입고 꾸미길 좋아하던 나는 양품점 물건들을 예쁘게 진열해놓고 파는 데 소질이 있었다. 당시로선 조금 늦은 서른셋에 결혼해 아이 둘을 낳아 길렀다. 틈틈이 백화점·화장품 회사 판매원으로 일하며 용돈을 벌었다. 남편은 경양식집을 했는데, 손이 부족할 때는 식당 관리도 도왔다. 아이들은 쑥쑥 크고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1996년부터 5년 동안은 한 대형할인마트 식육판매대에서 일했다. 스물셋부터 백화점에서 물건을 팔았으니, '베테랑 판매원'이 되어 있었다. 업계 전문용어로는 '대면(對面·사람 얼굴 보고 물건 파는 사람) 전문가'였다. 한때 반짝했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30년 전 성우의 꿈은 아주 오랜 동화처럼 빛을 잃어갔다. 아이들 뒷바라지하며 살림에 보태려고 이런저런 판매원으로 일하는 나는, 전형적인 한국의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지난해 3월 딸아이가 결혼했다. 군대를 제대한 아들은 한 식당의 보조요리사로 들어가 셰프의 꿈을 키우겠다고 했다. 아이들이 다 자랐다는 생각에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큰일 치르고 나니 몸도 고단해, 하던 일을 잠시 쉬기로 했다.

딸 결혼 후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케이블 TV를 보다가 벼락에 맞은 것처럼 아찔해졌다.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뉴 시니어 라이프'라는 재단에서 50~85세를 대상으로 '시니어 모델'을 구한다는 이야기였다. 할인마트에 일자리를 얻을 때도 '35세 이하'라는 연령제한 때문에 간신히 사정해서 들어갔는데, 50세 이상이 대상이라는 말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화려한 모델이 될 상상을 하자 풋풋하던 스무 살 시절 나를 들뜨게 했던 성우의 꿈이 다시 기지개를 켰다.

4개월짜리 시니어 모델 교육과정에 얼른 등록했다. 많은 이들이 시니어 모델을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 취미 삼아 하는 소일거리라고 생각하지만, 프로 모델들이 교육하는 훈련과정은 눈물 쏙 빠지게 힘들다. 꼼짝하지 않고 같은 자세로 5분 이상 버티다 보면 그동안 쓰지 않았던 허벅지·무릎·발뒤꿈치 근육이 욱신욱신 아파온다. 너무 고되다며 그만두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나는 새 일을 찾는 것, 사람들 앞에 나를 당당하게 내보일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열심히 배웠다.

첫 패션쇼는 한 결혼식장에서 열렸다. 예순이 넘어서도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어르신들을 위한 '특별한 결혼식'이라는 행사 뒤풀이 이벤트였다. 함께 교육을 받은 시니어 모델 30여명이 무대에 올라 축하 패션쇼를 열었다. 긴장되기는커녕 마음이 편안하고 힘이 솟았다. 환갑이 지났지만, 소녀 시절 나를 들뜨게 했던 '끼'는 역시 내 안에 살아 있었던 것이다.

요즘 나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나를 소개할 때 '시니어 모델'이라고 한다. 그게 무엇이냐고 되물으면 "한마디로 노인네 모델"이라고 웃으며 답한다. 평균 연령이 늘어나면서 고령 인구가 많아지는 요즘, 나이 많은 사람들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나의 일이다. 지난 1년 동안 3개월에 한 번꼴로 무대에 섰다. 지하철 2호선 선릉역에서 패션쇼를 열기도 하고, 동대문 서울패션아트홀에선 서울대 음대 학생들이 연주한 현대음악에 발걸음을 맞췄다. 화려한 조명 아래,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를 꾸미고 무대에 서는 순간은 환희 그 자체다.

머리는 어느새 '파뿌리'지만 마음속 '소녀의 꿈'은 내가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고맙고 즐겁다. 젊은 날의 두근거림을 접고 살다 인생의 만추(晩秋)와 맞닥뜨렸을 때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삶의 무대엔 마지막 순간까지 조명이 꺼지지 않고, 그 무대를 비워두는 건 한 번뿐인 인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참 쉬운 삶의 지혜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