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가 사는 법] 1000승, 마법이 시작된다

경마는 흔히 '마칠기삼(馬七騎三)'이라고 한다. 기수(騎手)보다 말(馬)의 능력에 따라 승부가 갈리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경주마를 육성하고, 어떤 말에 어느 기수를 태울지 등 전술을 짜는 게 모두 조교사의 몫이다. 조교사는 말과 기수를 선수로 부리는 '경마 감독'인 셈이다.

경마계의 '명장(名將)'으로 손꼽히는 신우철(59) 조교사가 5일 과천 서울경마장에서 국내 최초로 통산 1000승에 도전한다. 1983년 조교사를 시작해 28년 동안 999승을 거둔 그는 "나는 태어날 때부터 말과 함께 살아갈 운명이었다"고 말했다.

신 조교사는 1952년 서울 신설동 경마장에 있던 기수 숙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3세 때부터 말을 탄 기수(騎手)였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말 타기 흉내를 낼 때 신 조교사는 진짜 조랑말 위에서 칼을 휘두르며 장군놀이를 했다.

"아빠 같은 기수가 되겠다"고 했지만 부모는 반대했다. 위험하고 수입도 변변치 않다는 이유였다. '말 쫓아다니며 키운 뜀박질 실력'으로 축구 선수가 됐다. 하지만 이번엔 다리 부상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축구 특기자로 입학한 고려대를 2년 만에 자퇴하고 군에 입대했다. 군마부대에서 군인들에게 말타는 법을 가르쳤다. 제대 후 곧바로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끊어진 줄 알았던 말과의 인연을 다시 이은 계기는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기수에서 은퇴해 조교사로 일하던 아버지가 1978년 겨울, 경마장에서 말 훈련을 시키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마사회가 "선친의 뒤를 이을 생각이 없느냐"고 연락해 왔다. 신 조교사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에 고민 없이 기수양성학교에 들어가 교관이 됐다"고 말했다. "교관생활을 하면서 5년 만에 조교사 시험에 합격했어요. 조교사가 돼 경마장에 처음 나섰을 때 아버지 생각이 나 감격스러웠죠."

그는 데뷔 3년 만인 1985년 43승을 거두며 일약 '스타 조교사'로 도약했다. 하루 10경주까지 출전할 수 있는 기수와 달리 조교사는 1주일에 많아야 5~6경기 정도 참여하기 때문에 승수 쌓기가 쉽지 않다. 신조교사가 키운 말들은 지금까지 7432번 경주에 출전해 999번 우승했다. 그가 조련한 말들이 벌어들인 우승 상금만 188억4149만원에 달한다. 우승 상금의 7~8%를 받는 신 조교사는 지난해에만 3억원 가까운 수입을 올렸다.

그는 지난 28년 동안 새벽 5시에 마방(馬房)을 살피는 일로 하루를 열었다. 요즘도 자신이 관리하는 35마리 말을 하나하나 살피고, 경주로에 나가 상대 경주마들의 상태를 꼼꼼히 종이에 적는다. 그는 "평소 경쟁자들에 대한 자료를 꼼꼼히 수집해야 작전을 잘 짤 수 있다"고 했다.

가슴 아픈 일도 많았다. 1987년엔 6년간 애지중지 키워온 '중원호'가 복통으로 쓰러졌다. 꼬박 이틀 밤을 새우며 돌봤지만 결국 경주로 가장자리에 묻어야 했다. 그는 "자식 먼저 떠나보낸 것처럼 슬퍼서 며칠을 술만 마셨다"고 말했다. 6년 전부터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심장이 빨라지는 증상이 나타났다. 공황 장애였다. 의사는 그에게 "평생을 승부에 쫓기며 살아왔기 때문에 생긴 병"이라고 했다.

그는 "아내의 내조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결혼 전 경마장 안내원으로 일했던 아내 이재남(54)씨는 말이 아플 때면 며칠이고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 남편을 이해하고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큰아들이 태어난 날에도 경주 다 끝내고 한밤중에 병원에 갔어요. 꼴 보기 싫은지 등을 휙 돌려 누운 게 유일한 원망의 표시였죠."

그는 "1000승을 달성한 뒤에는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평생을 말과 함께했으니 지겨울 때도 됐겠다"고 눙치자 신 조교사가 정색을 했다. "아, 그게 아니라 이젠 종마(種馬) 생산하는 일을 해볼 생각이거든요." 사람보다는 말과 함께 한 시간이 더 많았던 초로(初老)의 사나이는 말과의 또 다른 인연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