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를 이은 한국 여인 솜씨… 할머니는 전쟁통 포목점에서 외손녀는 미국의 디즈니에서

    입력 : 2011.03.09 03:01

    디즈니 패션&홈 부사장 수 구

    인어공주에서 영감 받은 팔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고 만든 목걸이를 하고 있는 수 구.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월트디즈니는 국내 소비자에겐 영화·캐릭터 회사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요즘 미국에선 라이프 스타일 종합 브랜드로 통한다. 5~6년 전부터 수천달러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고가의 웨딩 드레스, 고급 디자인 가구가 디즈니의 이름으로 판매된다. 이런 디즈니의 변신을 주도하는 분야는 디즈니의 패션&홈(Fashion&Home) 부문. 이 일을 책임지고 있는 크리에이티브 부사장이 재미교포 1.5세인 수 구(Soo Koo·한국명 구수영·42)씨다. 갤러리 '아워플레이스 인데코'의 초청 강연회 참석 겸 시장 조사를 위해 서울을 찾은 그녀를 지난 6일 만났다.

    "디즈니는 싸구려 캐릭터 티셔츠나 파는 곳이라는 생각을 지워버리세요. 이제 디즈니는 몇십달러짜리 초저가 제품부터 초고가 제품을 만드니까요." 구씨는 치렁치렁 감고 온 팔찌와 목걸이를 가리켰다. 그녀는 "작은 조개 장식이 달린 금팔찌는 '인어공주'에서, 진주 목걸이는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며 "언뜻 봐서는 디즈니 제품인지 모르는 고급 패션·디자인 제품을 만드는 것이 내가 하는 역할"이라고 했다.

    구씨가 이끄는 패션&홈 부문을 포함한 디즈니 소비재의 연간 매출 규모는 약 26억78만달러(약 3조원). 현재 디즈니그룹 전체 매출의 7% 정도이지만 디즈니에서 사활을 걸고 확장하고 있는 신사업 영역이다.

    패션 명문인 '오티스(Otis) 칼리지 오브 아트 앤 디자인' 출신인 그는 'BCBG 막스아자리아' '비앙카 네로' 등에서 수석 디자이너로 일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Soo Koo'라는 자체 브랜드로 활동하면서 유명 패션지 'WWD'에서 주목할 디자이너로 소개되기도 했다. 구씨는 "2002년 명품 분야를 강화키로 한 디즈니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의해왔다"며 "고급 여성복을 해오면서 쌓은 노하우와 인적 네트워크를 디즈니의 이미지 변화에 써달라는 것이었다"고 했다. 2002년 디자이너로 디즈니에 입사한 그녀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거쳐 2007년 부사장직에 올랐다. 구씨는 "내 주도로 최근 '콤데가르송', '스텔라 매카트니', 오바마 대통령 부인 미셸 오바마가 좋아하는 보석 브랜드 '톰 빈스' 등 명품 브랜드와의 콜라보레이션(협업)을 이끌어냈다"며 "대중적이면서도 최상류층의 입맛까지 충족시키려 한다"고 했다.

    그는 요즘 세계 패션업계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 걸 실감한다고 했다. "유명 트렌드 분석 회사인 WGSN 같은 곳에서 트렌드를 미리 볼 수 있는 곳으로 서울을 추천하고 있을 정도"라고 했다. 그는 "상하이 패션은 아직 카피(복제)하는 수준이고 도쿄는 독특하긴 한데 뭔가 어색한 반면, 서울은 세련되게 정제된 느낌"이라며 "특히 가로수길과 삼청동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들의 감각이 뛰어나다"고 했다.

    구씨는 "지금의 내가 있게 해준 분은 외할머니"라고 했다. 6·25 전쟁 직전 이북에서 남편을 공산당에 잃고 월남한 외할머니는 포목점을 했다. 함께 이민 간 할머니는 바느질하고 재단하는 법을 어린 손녀에게 알려줬다.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식당과 식품 공장에서 일하며 뒷바라지해준 부모님도 든든한 후원자. 그는 "내 유일한 목표는 자식의 더 나은 삶(better life)을 위해 희생하신 부모님께 더 나은 삶을 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미혼인 그는 곧 한국 아이를 입양할 계획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