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끼니꾸 드래곤' 아버지 용길(신철진)과 그
의 아내 영순(고수희) / 연극‘야끼니꾸 드래곤’에서 막내아들 도키오가 지붕 위에 올라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있다. 집단 따돌림을 당한 그는 여기서 몸을 던진다 / 예술의전당 제공
무대에 벚꽃이 진다. 잿빛 함석지붕은 점점 복숭앗빛이 된다. 강제 퇴거당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순간, 벚꽃은 기세 좋게 날린다. 용길(신철진)은 짐보따리와 아내 영순(고수희)을 실은 손수레를 끌고 힘차게 길을 나선다. 뿌리박고 싶었던 땅과의 이별이다. 집단 따돌림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아들 도키오가 지붕 위에서 팔을 흔들며 배웅한다. 눈사태처럼 벚꽃이 쏟아진다.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용길이네 곱창집)은 이렇게 닫힌다. 감동의 절대량을 저울에 달 수 있다면 올해 예정된 공연 중 이보다 더 묵직한 작품은 없을 것 같다. 한국 예술의전당과 일본 신국립극장이 공동 제작한 '야끼니꾸 드래곤'은 이미 펀치력이 검증된 드라마다. 2008년 초연해 일본에서 요미우리 연극상과 아사히 공연예술상을 휩쓸었고 한국에서도 그해 주요 연극상에 이름을 올렸다. 3년 만에 돌아온 이 작품은 9일 개막해 20일까지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 오른다. 내한에 앞서 지난달 열린 일본 공연은 개막 전 전회 매진을 기록하며 화제가 됐다.
'야끼니꾸 드래곤'은 1969년부터 1971년까지 일본 오사카에서 곱창집을 운영하는 한 재일교포 가족을 들여다본다. 사실적인 무대는 관객이 입장할 때 고기 굽는 냄새와 연기까지 뿜어낸다. 둘째 딸의 결혼식을 앞둔 곱창집. 술잔이 오가고 장구와 아코디언 소리가 더해져 떠들썩하다. 지붕에 올라간 도키오가 복잡한 가족 구성을 설명한다. 큰딸과 둘째 딸은 아버지 용길이, 셋째 딸(주인영)은 어머니 영순이 데려온 자식이고 자신은 둘 사이에 태어난 막내이자 장남이라는 것이다.
이 연극은 재일동포 작가 정의신이 쓰고 연출했다. "한국과 일본, 두 국가와 나 자신과의 거리 때문에 쓴 희곡이다. 우리는 버려진 국민이며 마이너리티(소수)"라는 그의 고해성사처럼, 이 연극은 양국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한 무대를 만들면서 재일동포라는 존재를 재발견한다. 이 연극에는 '가슴을 쿵 울리는 인생'이 있었다. 감정의 격랑이 소용돌이쳤고, 둑이 터지듯 눈물을 흘린 관객이 많았다. 평론가들은 "코미디적인 삶의 활력과 페이소스를 그려 사유와 감동을 함께 안겼다" "재일동포에 대한 깊은 성찰, 한일 양국의 문화소통을 보여줬다"고 했다.
무대는 봄으로 열려 여름·가을·겨울을 지나고 봄으로 닫힌다. 결혼, 퇴거, 불륜, 집단 따돌림, 크리스마스, 자살, 축제, 임신, 이별 같은 재료로 속을 채운 이 연극은 40년 전 재일동포들의 굴곡진 삶을 내시경처럼 들여다보며 요즘 관객까지 설득하는 힘이 있다. 리어카와 선풍기, 수돗물과 비행기 소음과 싸움질 같은 장치가 좋고, 집의 골조만 남기고 모조리 뜯어내는 철거 과정도 가슴 서늘하다.
이 한·일 합작품은 무엇보다 우리 배우들의 연기력 덕에 더 뭉클하게 돌진해온다. 대사의 90%가 일본어인데, 신철진·고수희·주인영·박수영 등은 거칠지 않은 일본어로 연극의 결을 더 또렷이 살려낸다. 신철진과 고수희는 이 작품으로 요미우리 연극상 남녀 연기상을 받았다. 우리 관객 입장에서 이 연극은 자막을 봐야 한다는 게 가장 큰 부담이다. 150분 동안 3000여번 자막이 바뀐다.
이번 공연은 일본 배우 한 명이 암으로 별세해 다른 배우가 들어온 것 말고는 초연 그대로다. 마지막의 '꽃비'는 흔히 쓰이는 연극적 장치지만 이 작품에서는 훨씬 강력한 정서로 다가온다. 매회 라면박스 2개 분량의 종이 벚꽃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