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나이 합해 173세 "연기 안 하는 연기했지"

"3월에 내리는 눈처럼 금방 녹아 없어지지. 인생이 그래. 나이 들어 없어지면 그만이지 뭐. 연극도 커튼콜 박수소리와 더불어 소멸하는 게 매력이고."(장민호)

"지위가 있나, 모아놓은 돈이 있나. 이 연극, 딱 나를 보는 것 같애. 평생 연극만 보고 살아왔잖아. '조금 덜 세련되지만 순수하게는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낯부끄럽지 않게 하게 돼."(백성희)

11일 오후 9시 20분 서울 서계동의 백성희장민호 극장. 연극 '3월의 눈'(배삼식 작·손진책 연출) 첫 공연이 끝나고 주인공이 커튼콜을 위해 등장하자 긴 기립박수가 번졌다. 구부정하고 느리지만 여전히 짱짱한 '현역'의 연기력을 보여준 두 배우는 손을 맞잡으며 "수고했다"고 서로 격려했다. 장민호(87)·백성희(86)는 뒤로 돌아 후배 배우들에게 박수를 쳐줬다. 둘이 합쳐 173세인 두 배우가 기념비적인 무대를 마친 순간이다.

'3월의 눈'은 국립극단의 두 원로 배우를 위해 쓰인 헌정 연극이다. 장민호가 맡은 '장오', 백성희(본명 이어순이)가 맡은 '이순' 도 배우 이름에서 따왔다. 1945년 황해도 신천에서 혈혈단신 월남한 장민호의 개인사도 이야기에 녹아 있다. 이날 한옥집 안마당 같은 객석(250석)은 잔칫집처럼 연극인들로 가득 찼고, 두 배우가 퇴장할 때까지 환호성과 갈채가 이어졌다.

장민호·백성희는 '태극기 휘날리며' '봄날은 간다' 같은 영화에도 출연했지만 1950년부터 60년 넘게 국립극단을 지킨 '무대지기'다. 장민호는 '파우스트' '성웅 이순신', 백성희는 '달집' '만선'으로 유명하다.

'3월의 눈'은 오래 묵은 한옥을 배경으로 장오와 이순의 하루를 담백하게 그렸다. 장오는 손자를 위해 집을 팔아 요양원으로 가야 할 처지고, 사별한 이순과 대화하며 문창호지를 바른다. 두 배우는 '소리가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시간까지 계산한다'는 전설처럼 정확하고 잘 들리는 화법, 부드러운 호흡으로 관객을 집중시켰다. 잠깐의 침묵마저도 서정적이었다. 입으로 푸우~ 물을 뿜어 헌 문창호지를 뜯고 풀을 발라 새 창호지를 붙이는 장면, 이순이 길 떠나는 장오에게 팔 한쪽이 없는 스웨터를 입혀주고 껴안는 대목, 일꾼들이 문짝과 마루를 쿵쾅쿵쾅 뜯어내는 장면 등에서 가슴이 서늘해졌다.

장민호는 "이번엔 '연기를 안 하는 연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백성희는 "작가가 보이지 않고, 연출이 보이지 않고, 배우가 보이지 않아 더 진짜 같고 생활 같은 연극"이라고 했다.

이 연극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장민호·백성희의 건강이었다. 초반부에는 백성희가 감기를 앓았고 요즘엔 장민호의 몸상태가 베스트는 아니다. 이틀에 한 번꼴로 병원에 다닌다고 했다. 국립극단은 만약을 대비해 대체 배우를 준비했다.

"무대 못 서면 큰일 날 뻔했는데 하늘이 봐주셨어. 감기 정도로 끝냈으니."(장민호)

"교대로 아프면서 질척질척 왔어. '장 선생 안 나오면 나도 안 한다'고 했지. 이 작품, 두 노인네 놓고 쓴 거예요. 우린 '공동 운명체'야."

무대에서 두 원로 배우의 삶과 겹쳐지는 대목에서 관객은 웃고 또 울었다. 해체돼 흩어지는 집처럼 다 비우고 가는 인생이었다. 그 길 위로 죄 없는 눈이 내렸다. 극작가 배삼식은 "두 분이 계시지 않았다면 엄두도 못 냈을 작업"이라고 했다. 2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