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민의 평점따윈 필요없어] 백년을 살아 숨쉬는 인간… 천년을 살아 숨쉬는 한지

'달빛 길어올리기'는 두 손으로 물에 비친 달빛을 길어 올리다 놓친 자리에 은은히 고인 나의 얼굴을 보게 되는, 그런 반추의 여운이 남는 영화다.

첫 장면은 만년 7급 공무원 필용(박중훈)이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작업(실록을 한지에 그대로 본뜨는 사업)을 위해 임명장을 받는 데에서 시작된다. 필용은 자신의 외도로 인한 충격으로 뇌경색을 앓는 아내 효경(예지원)의 병수발에 지칠 대로 지쳐 있다. 그는 어떻게든 이번 일로 출세길에 직행하고픈 마음만 급하다. 그는 한지 장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종이공예를 해온 아내에게는 무관심했으면서 정작 아내가 종이를 만질 수 없는 몸이 된 지금에서야 한지에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지가 먹을 머금듯 자연스럽게 그 매력에 빠져들고 만다.

영화 속 다큐멘터리 감독 지원(강수연)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잡힌 한지의 다양한 색과 질감들을 보다 보면 한지의 선전과 홍보라는 공무원 마인드를 삐딱하게 보던 관객도 필용의 변화에 동조하게 된다. 우리의 옛것을 알리겠다는 임권택 감독의 뚝심과 의지는 우리로 하여금 그 부드러우면서 강하다는 한지의 결을 만져 보고파 저도 모르게 스크린을 향해 손을 뻗게 만든다. 양반네 서가에 걸린 족자에서부터 새색시가 시집갈 때 가마에 숨기고 탔다는 종이 오강까지, 한지의 다채로운 멋과 쓰임에 눈을 뜨는 일은 새삼 반갑다.

'종이는 천 년 비단은 오백 년'이라는 말이 있듯 영화에서는 천 년을 살아 숨쉰다는 한지의 놀라운 내구성을 강조한다. 바람에 날리는 한 장 얇은 종이가 영원의 시간에 도전한다니, 그 역사를 가능케 하는 장인들의 끈질기고 정직한 손길을 영화는 애타게 그리워하며 찾아 헤맨다. 마지막 장면 깊은 계곡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천 년의 염원으로 종이를 뜨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의 주인공으로 이만큼 어울리는 것도 또 없으리란 생각이 든다.

※감독=임권택, 출연=박중훈 강수연 예지원, 17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