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대지진에 세계 바둑계도 휘청

일본 열도가 대지진 참화에 시달리는 가운데 일본 바둑계도 크게 흔들리고 있다. 재앙이 시작된 11일 일본 최고 권위의 기성전 도전 6국 공개해설회가 취소된 뒤 길이 막힌 팬들은 일본기원에서 하룻밤을 지새웠다. 11일 열린 여류명인전 도전2국은 56수만에 중단, 15일 속개하기로 했다가 23일로 다시 미뤄졌다. 지난 한 주 대부분의 대국이 거행되지 못했다. 일본기원은 "21일부터는 정상 운영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상황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문제는 이것이 일본 바둑계만의 고통으로만 그칠 수 없다는 점. 비록 경기력에선 한국 중국에 역전당했지만 '바둑 인프라' 측면에서 일본을 능가할 나라는 아직 없다. 바둑을 자국의 전통문화로 인식하는 일본은 100년 가까이 세계 각지에 바둑을 보급하는 등 자타 공인의 세계 리더국가였다. 일본 메이저 타이틀 우승상금이 세계기전의 그것보다 큰 것은 바둑에 관한 한 '세계 위에 일본'이란 의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진 후유증이 장기화될 경우에도 주최사나 후원기업들의 지원이 이어진다고 장담하긴 힘들다. 원자로 사태 악화가 빚은 전력난은 교통, 통신, 난방, 급수 등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장 급한 상황에서 빠져나온다 해도 황폐해진 국민 정서 틈에서 바둑이 우선순위를 확보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국제바둑연맹 가입국은 71개국이나 되지만 핵심은 한·중·일 3개국이다. 일본의 역할은 특히 커서 여러 부문에서 큰 몫을 맡아왔다. 일본이 무너진다면 세계 바둑 전체가 휘청거릴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이유다. 이런 마당에 내달 9일 도쿄 소재 일본기원서 개막 예정이던 제24회 후지쓰배 세계선수권대회가 관심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후지쓰배는 일본이 1988년 창설한 세계 최고(最古)의 국제 타이틀전이 다. 작년까지 14년 연속 '외국 기사들 좋은 일'만 계속되고 있는데도 끄떡없이 계속돼 왔다. 올해는 특히 24강전을 32강전으로 확대하는 등 운영방식을 의욕적으로 개편하고 대진 추첨까지 마쳤는데 그 직후 재앙이 찾아왔다. 주최측은 어떻게든 대회를 강행하겠다는 자세다.

그러나 후지쓰배 개최 여부는 아직도 불투명하다. 각국이 도쿄 거주 자국민들을 다투어 철수시키고, 대사관을 폐쇄한 나라가 8개국에 이르는 판에 일본 입국은 부담스럽기 때문. 한국 대표로 뽑힌 기사들은 일본행이 찜찜한 표정들이고, 유럽 및 남미 대표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는 소문이다. 국내 바둑 전문 케이블방송은 현지 취재문제를 보류하고 있다.

조훈현 九단은 "피해 복구가 첫째"라며 사태의 빠른 진정을 기원했다. "바둑 문화적으로 선도적 역할을 맡아온 일본이 위축돼 한·중 양국만 남는 상황이 오지 않도록 모두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조 九단은 어린 시절 일본 유학을 다녀오는 등 국내 대표적 일본통(日本通)으로 꼽힌다.

한편 한국기원은 허동수 이사장 명의로 오다케(大竹英雄) 일본기원 이사장에게 위로 서한을 보냈다. '한국기원 직원 모두 큰 충격을 받았다. 빨리 피해를 수습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것을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100만 엔(약 1400만원)의 위로금도 함께 전달했다. 이와 별도로 프로기사회도 성금 모금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