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LG배 세계기왕전] 불과 얼음

〈제8보〉(88~101)=프로기사는 치열한 전투를 즐기는 '불(火)과(科)'와 냉정한 계산으로 바둑을 풀어가는 '얼음과'로 대별된다. 조훈현 이세돌 최철한 김지석 등이 전자라면 이창호 안조영 박영훈 등은 후자에 속한다. 쿵제와 퍄오는 둘 다 모험적 공격보다는 단단한 수비 전략에 능하다는 점에서 얼음과에 가깝다. 이렇다 할 접전 한 번 없이 구획싸움으로 시종하고 있는 이 바둑이 두 기사의 닮은꼴 기풍을 말해준다.

88은 부분적으론 당연한 수. 그러나 참고1도 1로 먼저 응수를 물어야 했다. 2로 받으면 백3이 선수(先手)로 듣는다. 이 수의 유무는 하변 백이 안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또 흑2로 A면 백B가 절대 선수로 들어 훗날 흑이 C로 붙여왔을 때 위력이 반감된다. 이런 수순을 놓치고 노타임으로 88부터 둔 것은 평소의 쿵제답지 않았다.

92 때 93은 정수. 참고2도 1은 4까지 백이 패(覇)로 버텨올 때 흑의 부담이 훨씬 더 크다. 97까지 이렇게 될 곳. 여기서 흑은 느닷없이 101로 붙여간다. 백 '가' 때 수가 나지 않는다면 큰 손해다. 백은 차단을 단행할까, 물러설까. 바둑은 불과 100수가 겨우 넘었을 뿐인데 벌써 마무리 분위기가 물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