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방곡곡 'Walk & Work'] 패션디자이너 이광희씨와 남산공원

서울 한복판의 남산(南山·262m)은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산은 산이지만, 국립극장이나 전망대 케이블카 같은 문화·위락시설이 더 유명한 산이다. 아예 안 가봤다는 사람도 더러 있다. 서울시민 상당수는 이 산의 아름다움을 눈앞에서 놓치며 살아간다.

패션디자이너 이광희(59)씨는 1986년 이태원동에 자신의 의상실('이광희부티크')을 열면서 남산을 곁에 두고 살았다. 그는 "남산에서 일하고, 남산에 살고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하다"고 했다. 하루 12시간 넘게 일하는 의상실은 남산공원으로부터 걸어서 3분 거리다. 그래서 그는 매일 오전 6시 남산공원으로 '출근'한다.

 

16일 오전 이광희씨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남산공원에 나타났다. 봄을 시샘하는 늦추위로 날씨는 쌀랑했다. 바람도 제법 강했다. 하지만 이씨는 수시로 겉옷을 벗어 팔에 걸며 특유의 쾌활한 목소리로 연방 "상쾌하다"며 탄성을 질렀다. "아무리 내 곁에 좋은 것이 있어도 직접 가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니죠. 그래서 매일 1시간씩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여길 걷고 있어요."

하얏트호텔 건너편에서 시작된 산책로는 야생화공원을 거쳐 팔도소나무단지로 이어진다. 공원 곳곳에 난 돌계단을 오르면 깊숙한 숲길이 펼쳐진다. 공원 초입부터 펼쳐진 야생화공원은 조경이 잘 꾸며진 여느 집 정원처럼 단정했다. 새순이 조금씩 얼굴을 내밀고 있는 이곳엔 185종의 야생화와 93종의 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씨는 1년 전부터 남산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순전히 건강 때문이었다. "오후 4~5시만 되면 피로가 몰려와 일에 집중하기가 힘들었어요. 허리가 아파 몸을 숙이기도 힘들었고요." 의사의 권유로 산책을 시작하면서 이씨의 건강은 놀랄 만큼 좋아졌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린 것 같아요. 운동을 하지 않으며 지낸 세월은 버린 시간이라고 생각될 만큼요."

한때 호텔 피트니스클럽에도 다닌 적이 있지만 얼마 안 가 발길을 끊었다.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긴 꽃도 있고 나무도 있고 새도 있죠. 어제 본 것이 오늘엔 또 달라요.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고, 혼자 조용히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도 정리하니 마음까지 치유되는 기분이에요. 하루라도 걷지 않으면 삭막해져 견딜 수가 없어요."

고급 의상실을 운영하며 패션의 세계에 뛰어든 지 30년이 넘어간다. 전·현직 대통령 부인들이 즐겨찾는 의상실로 손꼽힐 만큼 성공을 거뒀지만, 그는 "그만두고 싶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겉으로만 화려하지 패션디자인이란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제가 챙기지 않으면 안 되는 고된 일이에요. 원단을 구하는 것부터 공장에 일을 맡기는 것까지 모든 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다보니 스트레스가 많죠."

그는 팔도소나무단지에 들어서자 "소나무의 피톤치드(미생물을 죽이는 물질)가 건강에 좋다고 하지 않나요" 하고 물었다. 날이 좋을 때는 이곳에 야생 토끼도 나타난다고 한다. 이씨는 팔도소나무단지 너머 운동시설에서 한창 운동 중인 사람들을 가리켰다. "저분들 사이에 슬그머니 껴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듣는 것도 정말 재밌어요. 제가 너무 주책맞은가요? 하하."

이씨는 요즘 '희망의 망고나무재단'('희망고') 대표로 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수단에 망고나무를 심어 가난한 주민을 돕자는 운동이다. 그는 "재작년 수단 봉사활동을 갔을 때 망고나무 열매로 수십명 가족이 먹고사는 걸 목격했다"며 "망고나무 묘목을 대신 심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배고픔을 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1만5000여그루의 망고나무를 심었고 7월에도 나무를 심으러 수단으로 간다.

1시간 남짓 공원을 돌고 나니 햇살이 제법 따뜻해졌다. 총 289만8305㎡(87만6700여평)에 이르는 남산공원 전체 면적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코스다. 공원을 걸어 내려오며 그는 끄트머리에 있는 남산전시관을 가리켰다. "10여년 전 내 부티크가 있었던 곳"이라고 했다.

"매해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여길 찾으면 일부 소나무가 처참하게 쓰러져 있어요. 하나같이 덩치는 큰데 뿌리는 터무니없이 가느다란 나무죠. 애초 심기를 잘못 심은 거예요. 사람도 그래요. 겉보기엔 멀쩡한데, 생각이 얕은 사람은 곧 쓰러지고 말아요."

내년에 이순(耳順)이 되는 그는 "남산에서 매일 인생을 배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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