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한국영화의 '메카' 충무로 그 명성 어디로…

"원래는 지금이 제일 바쁜 시긴데, 올해는 할 일이 없네요."

3년째 충무로 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에서 일하는 김인숙(42)씨의 입에서 희미한 한숨이 배어났다. 여느 때 4월 같으면 8~9월에 열리는 영화제 준비로 여념이 없던 때였다. 영화제 출품작을 선정하기 위해 해외 영화제에 다니고, 자원봉사단 모집을 하던 시기였다.

올해는 아직 충무로 국제영화제 기본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서울 중구청에서 보조금으로 책정해놓은 1억원 말고는 예산이 없기 때문이다. 김씨는 "새로 선출될 구청장에게 보고할 현황만 검토하고 있다. 5월부터 준비해도 10~11월에 개최할 수 있는데, 매년 개·폐막식을 하던 국립극장의 대관 스케줄이 다 차 장소부터 걱정이다"고 말했다.

1억원이라는 예산이 말해주듯 올해 충무로 국제영화제는 담장 위를 위태롭게 걷고 있는 형국이다.

서울 중구청 관계자는 "구청장이 당선 무효형을 받아 현재 영화제 조직위원장 자리가 공석"이라며 "올해 영화제는 새 구청장이 재선거를 통해 취임하면 '폐지냐 존치냐'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단순히 영화제의 막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한국 영화의 메카였던 충무로의 위상을 말해주고 있다.

1960~70년대 영화를 꿈꾸는 이에게 충무로는 '꿈의 무대'였다. 1955년 스카라극장(옛 수도극장)에서 영화 '춘향전'이 크게 성공하면서 일대에 영화제작사들이 몰려들어 충무로가 형성됐다는 게 영화계의 중론이다. 당시에는 편집한 영화 필름을 옮기는 게 쉽지 않아 흥행하는 극장 근처에 영화사가 몰려들었다.

과거 충무로는 대원빌딩에서 영락교회 맞은편까지 약 250m 길이 거리에 늘어선 2~4층짜리 건물에 필름 현상, 편집, 영화인 관련 협회, 영화 제작사 등 300여개 영화 관련사로 가득했다. 명보·대한·스카라극장에서부터 종로의 서울극장과 단성사는 고달팠던 사람들이 시름을 벗어놓고 영화를 즐기던 극장이었다.

충무로에는 건물 하나 건너꼴로 다방과 여관이 즐비했다. 다방에는 촬영 전후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영화인들로 붐볐고, 여관에는 종일 영화 찍느라 지친 스태프들로 빈방이 없었다.

 

충무로의 영화사(史)를 책으로 낸 정종화(69)씨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찍은 이만희 감독과 배우 장동휘 등 이만희 사단은 '폭포수 다방'을 연락사무소로 삼았다"며 "가장 유명했던 여관은 '동신 여관'이었는데, 그곳에는 여관을 사무실로 썼던 시나리오 작가와 밤 촬영을 마치고 낮에 쉬러 온 배우가 있었다"고 전했다.

대기업이 영화배급·제작에 뛰어들면서, 영화산업의 중심은 충무로에서 강남으로 옮겨갔다. 서울 곳곳에 멀티플렉스가 등장하면서 충무로 일대 극장의 독점적인 지위도 퇴색했다.

낮은 건물들은 그대로지만 을지로에서 밀려온 인쇄소가 그 안을 메웠다. 거리에는 영화 카메라 모양의 기념 가로등과 가게 앞에 붙어 있는 옛 영화 포스터가 과거를 말해주고 있다.

충무로에서 35년째 돼지갈비집을 하는 홍한선(64)씨는 "통행금지 풀리는 새벽 4시부터 영화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해장국으로 배를 채웠다"며 "이제는 1960~80년대에 영화판에 있던 사람들만 가끔 들러 소주잔을 기울인다"고 말했다.

2007년 서울 중구는 한국 영화의 산실(産室)이었던 충무로를 되살리기 위해 '발견·복원·창조'를 모토로 충무로 국제영화제를 시작했다. 1회 영화제에는 박찬욱 감독과 영화배우 강수연씨가 나섰고, 임권택·유현목 감독 등 영화계 원로도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다. 첫회 때는 50만여명이 영화제를 찾았고, 좌석 점유율은 78%에 달했다. 2회 때는 영화제에 다녀간 사람의 수가 300만명으로 6배나 증가했다.

중구는 성공에 힘입어 길바닥을 한국영화 명장면과 포스터 등으로 꾸민 '글래스로드(Glass Road)'를 조성하는 등 일대를 '영화의 거리'로 만드는 사업에 나섰다. 3회에는 60억원의 예산을 편성하면서 화려했던 과거를 되찾는듯 했다.

그러나 구의회에서는 '구청장이 친척을 영화제 직원으로 채용하는 등 예산 운영이 방만하게 이뤄졌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등 악재가 이어졌다. 서울시에서는 예산 지원을 대폭 줄였고, 조직위원장을 맡아야 할 구청장이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결국 영화제 규모가 절반으로 축소되면서 존폐 기로에 섰다.

영화계에서는 "그동안 영화계 인사가 맡은 집행위원장이나 사무국보다 구청장인 조직위원장이 영화제를 좌지우지했던 것이 문제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충무로 국제영화제 김갑의 부조직위원장은 "충무로 국제영화제는 과거 충무로가 그랬듯 신인감독의 등용문이 되어야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