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결산 상장법인들이 작년에 55조9000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2009년에 비해 73%나 늘어난 사상 최대 실적이다. 주요 대기업들은 올 1분기에도 기록적인 순이익을 낼 것으로 예상된다. 1분기 수출실적이 1318억달러에 이르러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는 소식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외국인 주식투자 자금이 쏟아져 들어와 국내 증시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일본 대지진과 원전(原電)사고, 중동 사태, 유럽 재정위기 같은 잇단 대외 악재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 경제가 순조롭게 굴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장밋빛 지표의 뒤편을 들여다본 순간 살얼음판을 걷고 있듯 위태롭기 짝이 없는 우리 경제의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작년 말 현재 10대 그룹은 자본금의 12배가 넘는 이익잉여금을 곳간에 쌓아놓고 있을 정도로 돈이 넘쳐난다. 그러나 대다수 중소기업은 이자 갚고 임금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다. 고용의 88%를 차지하는 중소기업들의 형편이 어렵다 보니 근로자들의 임금도 거의 제자리걸음이다. 그래서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예전보다 더 고단하고 팍팍해졌다.
물가는 작년 하반기부터 날개를 달았다. 지난 3월 소비자물가는 4.7% 올라 3개월 내리 4%대를 나타냈다. 배추·마늘·파·고등어·돼지고기·사과 같은 식료품과 세제·화장지를 비롯한 생필품 값이 작년보다 적게는 10%, 많게는 70%까지 뛰어올랐다. 최근엔 정부가 우격다짐으로 억눌러왔던 가공식품 가격이 들썩이기 시작했고, 이·미용료와 목욕료, 학원비, 숙박비 같은 서비스 요금이 줄줄이 뛰고 있다. 여기에 더해 전세는 구하기도 어렵고, 월세는 뜀박질을 하고 있어 근로자들의 시름이 더 깊어지고 있다.
가계부채·공공부채는 이제 시한폭탄처럼 초침(秒針)이 돌아가고 있다. 작년 말 현재 개인들의 금융부채는 937조원으로 2009년 말보다 8.9% 늘었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진 이후 선진국 가계는 빚을 줄이고 있지만 우리는 거꾸로 계속 빚을 늘려왔다. 2009년 말 기준 우리나라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44%나 된다.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사태가 났을 때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29%였다. '빚더미 제국'이라고 했던 미국보다 우리가 더 위험한 상황이 돼버렸다.
더욱이 350조원에 이르는 주택담보대출은 터지기 직전의 풍선과 같다. 현재는 그 중 84%가 이자만 갚고 있는 대출이지만 올해부터 이자만 갚는 거치기간이 만료돼 원금과 이자를 같이 갚아나가야 하는 대출 비중이 크게 늘어난다. 예를 들어 2008년에 3년 거치 5년 원리금 분할 상환 조건으로 2억원을 빌렸던 사람은 그동안 매달 110만원의 이자만 갚다가 올해부터는 370만원을 내야 한다. 물가 불안 때문에 대출금리까지 오르고 있다. 빚더미 가계가 언제 손을 번쩍 들지 모를 형편이다. 한국판 서브프라임 사태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는 경고가 나올 정도다.
작년 말 현재 나랏빚도 393조원에 이른다. 아직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라지만 증가속도가 지나치게 가파르다. 건강보험 재정은 2020년 16조원, 2030년 48조원의 적자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연금기금이 바닥나 국가가 그 부담을 떠안게 될 날도 다가올 수밖에 없다. LH공사(
토지주택공사)가 120조원이 넘는 빚더미에 깔려 정부에 손을 내밀었듯이 공기업 부채는 물속에 잠긴 빙산(氷山)의 아랫부분처럼 그 크기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건설회사들이 줄도산하고 그로 인해 저축은행 문제가 다시 불거지면서 금융시장이 요동치게 될 위험도 여전하다. 유럽발 재정위기에다 중동발 유가 급등이 겹쳐 외국인 투자자금이 한꺼번에 빠져나가 경제위기의 방아쇠를 당길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은 마땅한 정책수단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물가를 잡고 인플레 기대심리를 떨어뜨리려면 금리를 올려야 하지만 그러면 가계부채 문제가 터진다. 부동산 경기를 띄우면 건설업계와 저축은행 부실을 막고 전세금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만 물가를 자극하고 가뜩이나 무거운 가계부채에 새 짐을 얹게 된다. 환율 정책도 물가와 수출·성장·고용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한다.
당장은 폭탄 터지듯 사방으로 흩어지는 문제들을 추스르고 조정하는 게 시급하다. 그러면서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 정교한 정책조합을 찾아내야 한다. 결국 성장보다는 안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다. 경제 감속(減速)의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우리 경제의 잠재부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야 한다. 실업자가 100만명이 넘고 아예 구직(求職)을 포기한 채 그냥 놀고 있는 사실상의 실업자가 200만명에 이른 상황에서 성장의 문제를 도외시할 수는 없지만 대기업 수출이 아무리 늘어도 고용이 따라 늘지 않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진짜 문제는 성장과 안정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정치권의 동향이다. 총선과 대선이란 내년 정치일정에 등을 떠밀린 정부·여당은 경기부양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고, 여·야 없이 복지경쟁과 선심 공약으로 경제정책을 뒤흔드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누군가 나서서 우리 경제의 실상을 국민에게 용기 있게 알리고 고통 분담을 설득해야 하지만 그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