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강원도 둔내에서 온 친정어머니의 이메일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않아(앉아) 딸의 편지 읽으니 기분이 조타(좋다). 선희가 신혼여행 갔다가 어제 와서 자고 오늘 갔다. 엄마는 냉이를 캐왔다. 김 서방이 찾는 법을 자세히 알려줘 조굼(조금) 더 배운 것 같다. 항상 고맙고 사랑한다."

퇴근 후 컴퓨터를 켜자마자 친정엄마에게서 온 이메일부터 확인하는 게 한동안 습관이 됐다. 받침은 엉망이지만 엄마 편지를 읽으면, 고향 집 마루에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올해 75세인 친정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 둔내에서 큰오빠 내외와 농사를 지으며 살고 계신다.

엄마가 이메일을 하게 된 것은 몇 년 전이다. 시집온 후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딸네 집을 찾았다가 주무시고 간 날이었다. 몇 번이나 친정부모님을 모시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고추밭에 물을 주어야 한다거나 상추를 심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시곤 했다. 넉넉하지 않은 딸자식 살림을 축낼까 봐 못 오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늘 죄송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아버지까지 동행하고 충남 아산 시골의 작은 아파트까지 오셨다. 엄마는 그날 아이방의 컴퓨터를 유심히 쳐다보셨다. 심심하지 않으시게 고스톱이라도 가르쳐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컴퓨터를 켰는데, 누군가 보낸 이메일이 와 있었다. 메일을 읽는 내 모습에 엄마는 참 신기하다며 알려달라고 하셨다.

우선 영문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만드는 과정을 설명한 뒤, 엄마에게 짧은 메일을 보냈다. 이튿날 시골집으로 돌아가신 엄마가 전화했다.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어디로 들어가야 네 편지를 읽을 수 있는지 알려 달라고 하셨다. 그 뒤 며칠 동안 편지를 읽는 법부터 보내는 법까지 몇 차례 되풀이해서 일러 드린 후에야 엄마의 전화는 멈췄다. 대신 고향의 엄마가 금방 지은 따뜻한 밥 같은 글이 날아왔다.

"날이 따스해지니 농사준비 하느라고 감자눈도 따고 '하오쓰'(하우스)에 부로클리(브로콜리)도 마니(많이) 자라고 얼마 안 있으면 밭에 비닐 펴야 하겠지. 올 농사가 잘되길 바라면서 즐겁게 일해야 하겠지. 돈도 좋지만은 건강이 제일이니 항상 가족 몸 관리 잘하길 바란다."

독학으로 한글을 깨친 엄마의 메일은 글은 어설프지만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깨우쳐준다. 엄마는 평소 살갑게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는데 메일에선 모녀간의 정(情)을 듬뿍 담아 보낸다.

"엄마가 컴퓨터 한니(하니), 딸 하고 메일을 주고 �f는(받는)다는 게 참 재미있다. 시대가 좋아져서 조운대(좋은데), 아는 게 없으니 답답할 때가 많다. 배우고 싶은 것도 많은데, 들으면 그 자리에서 잊어버린다. 딸, 외손녀딸, 사위 모두 건강하길 바란다. 상랑(사랑)한다."

칠순 잔치 대신 가족이 모여 생일상을 올리던 날 엄마는 허름한 장롱에서 금반지와 금목걸이를 꺼내 두 며느리에겐 목걸이를 채워주고, 두 딸에게는 금반지를 손수 끼워주었다. 나는 반지를 빼어 "이렇게 좋은 것, 해 드린 적도 없는데 왜 주냐"고 훌쩍거렸다. 엄마는 "네가 돈 벌어 다시 해주면 되지 않느냐"고 하셨다.

항상 오남매가 잘 되기를 소망했던 엄마는 지난해 건강이 좋지 않았던 작은오빠를 잃는 아픔을 겪고부터 부쩍 늙으셨다. 젊어서 아픈 아버지 병원비와 약값 대고 자식 먹여 살리느라 시작한 청소일을 일흔까지 하셨다. 내가 지금 하는 일도 백화점 환경미화원이다. 10년 정도 마트 수납원을 하다가, 5개월 전에 직장을 옮겼다. 힘들게 느껴질 때는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오남매를 책임져야 했던, 절박한 심정의 엄마를 떠올리곤 한다.

새벽에 출근하면서 가끔 전화를 걸면, 엄마는 늘 안쓰러워하신다. "힘들지? 그 일이 해도 표시가 안 나는 일이야." "엄마, 힘들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내가 하는 것뿐이고, 깨끗해지면 기분이 좋은데요." 가끔 엄마에게 "예전에 일할 때 힘들지 않았어?" 하고 물으면, "쑥쑥 크는 너희를 생각하면 세상이 즐거워"라고 하셨는데, 나 역시 잘 자라준 두 딸을 생각하면 마음이 기쁘다. 그 어떤 엄마보다 깊은 정으로 키우셨지만 자식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해주고 키운 것을 후회하는 엄마를 보며 대학생으로 훌쩍 자란 내 두 딸에게 전화해서 "사랑해"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엄마와 주고받던 메일이 끊어진 것은 친정집의 컴퓨터가 고장 나면서부터다. 학생이 있는 집이면 숙제 때문이라도 빨리 수리하겠지만, 시골이고 사람을 불러야 하니 수리하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엄마, 죄송해요. 조금만 형편이 나아지면, 새 컴퓨터 꼭 사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