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내 인생] 가정주부에서 웰다잉 전문가 된 이정옥(73)씨

"○○이 엄마, 빨리 유치원으로 가봐. 빨리빨리! 큰일 났어."

이웃에 사는 아들 친구 엄마가 숨이 턱에 차오른 채 나를 불러댔다. 자초지종을 물을 겨를도 없이 그녀의 손에 이끌려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으로 달려갔다. 몇 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불길한 예감이 빗나가길 바랐건만 유치원 마당에 들어서니 선혈이 낭자했다. 일곱 살배기 내 아이의 작은 몸에서 나온 것이었다. 유치원에 위태하게 서 있던 미끄럼틀이 쓰러지면서 아이를 덮치고 말았다. 피투성이 아들을 보자마자 나는 의식을 잃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아이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첫 아이와 이별해야 했다. 그로부터 어느덧 40여 년이 흘렀지만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오른눈에 남아있다. 눈물에 짓물러 시신경이 손상되는 바람에 시력을 거의 잃었다.

아이를 떠나보낸 슬픔을 삼키며 나는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자상한 남편의 위로 속에 남은 딸과 새로 태어난 네 아이를 뒷바라지하며 마음의 상처를 애써 덮었다. 가전제품 대리점을 운영하던 남편은 근면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늘 나의 아픔을 보듬으려 애썼다. 하지만 하늘은 참 매정도 했다. 1991년 남편이 당뇨를 앓던 내 약을 사러 경기도 포천으로 내려가던 길에 중앙선을 넘어온 트럭을 피하려다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남편은 혼수상태로 온몸에 붕대를 친친 감고 병실에 누워 있었다. 남편의 몸에서 생(生)의 불씨가 점점 사그라져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지만 병원에서는 그 몸에 대고 계속 수술을 하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의사에게 말했다. "이제 그냥 편히 가게 해주는 게 어떨까요." 그랬더니 의사는 "정말 부인이 맞느냐?"고 되물었다. 마음이 아파도 더 아프고, 되살리고 싶은 마음이 많아도 더 많은 게 나였다. 그런 내가 그렇게 말한 건 점점 파래져 가는 남편의 손톱을 보고서였다. "여보, 제발 나 이만하고 저세상으로 가고 싶어. 너무 고통스러워." 손톱이 말하는 것 같았다. 결국 죽음 곁에도 가기 싫었던 내가 또 죽음을 마주하고 말았다.

아이와의 이별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이별이었다. 내가 절룩거릴 때 부축해 주던 든든한 버팀목이 예고도 없이 저 하늘로 가버렸을 때의 상실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넋 놓고 몇 개월을 보내다 남아 있는 다섯 아이를 위해 다시 마음을 단단히 동여맸다. 의지할 데라곤 종교밖에 없었다. 50대의 늦은 나이에 신학을 배우고 전도사가 됐다. 하지만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여러 사람의 죽음을 봐야 했다. 어느 하나 사연 없지 않은 죽음들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죽음을 미리 준비할 수는 없을까. 그러면 떠나는 이도, 남은 이도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을 텐데….'

그러다 우연히 한 복지재단에서 하는 호스피스 프로그램 안내문을 봤다. 죽음이라면 이력이 난 내가 죽음 맞는 법을 가르쳐 준다니 아이로니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처럼 깊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야말로 죽음을 맞은 이들의 마음을 더 절실히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0년대 중반 '죽음학'이 정식 학문으로 인정되고 복지재단에 '웰다잉 전문강사' 코스가 생겼다. 내친김에 전문성을 갖춰 제대로 죽음을 전공 삼아야겠다고 마음먹고 강사증을 땄다.

이후 나는 웰다잉 전문강사로 노인대학과 양로원 등을 돌며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을 강의하고 있다. 생전 유서를 써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됐을 때를 대비하게 하고 연명치료에 대한 의견을 사전에 남길 필요성을 가르친다. 웰다잉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연극도 한다. 처음엔 남의 얘기처럼 귀담아듣지 않던 노인들도 유언 한마디 없이 떠난 남편, 펴보지도 못한 채 사그라진 내 아이 얘기를 하면 귀를 쫑긋한다.

3년 전 나는 또 한 번의 시련을 겪었다. 우연히 병원에 갔다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남의 죽음을 이야기하다 내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러면서 나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

두 번의 죽음은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나를 웰다잉 전문가라는 새로운 길로 인도했다. 내 인생 2막은 숙명이자 먼저 떠난 두 생명을 위한 진혼(鎭魂)일지도 모른다. 나와 같은 고통을 겪었던 이들에게 감히 말하고 싶다. 다시 들춰보고 싶지 않은 불행과 상처도 어쩌면 남을 위해 봉사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씨앗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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